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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May 22. 2024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

나만의 위도에 맞는 자존의 섬을 찾아서.

                 


2015년, 저는 한국에서 잘 다니던 패션지 에디터 일을 그만두고 태국 사람도 잘 모르는 작은 외딴섬으로 떠났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잔혹한 서울에서 신기루를 좇으며 허비하는 시간의 주인은 바로 저였습니다. 사회에서 부여받은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게, 아니 열정적으로 다 했습니다. 우등 소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죠. 내가 소비자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곧바로 내쳐질 삶이란 걸 일찌감치 알았지만, 예민한데 정의롭기까지 해 불편한 것들 투성이인 슬픈 도시 서울, 대한민국을 떠날 용기가 없어 내내 망설였습니다. 하루하루, 실체가 없는 서울의 망령과 버티듯, 싸우듯, 무의미하게 보냈습니다.      


잡지 일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오피니언 리더와 문화예술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황금기를 누리던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잡지가 끝물에 접어들 때 서른 넘어 펜을 잡은 늦깎이 에디터로 목격한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은 답답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천천히 침몰하고 있는 화려한 크루즈, 그것도 모르고, 아니 알면서도 샴페인 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속에서 최대한 중심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도무지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당장 이 배에서 바닷속으로 뛰어내리거나 미친 척 저들의 파티에 동참하거나, 선택은 둘 중 하나였죠.  


    


내 삶에서 단 한 번이라도 진정 스스로 한 선택이 있는지 떠올려 봤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딸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반항을 하긴 했지만 공부를 하라니 하고, 대학을 가라니 가고, 돈을 벌라니 벌고, 정이 들었으니 연애를 했습니다. 남들이 가끔 여행도 가니 따라다니고, 이게 유행이라니 따라 사고, 저게 좋은 취향이라니 따라 하며 살았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시티 걸’로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걸 제 것인 양 적당히 아는 척하며 적당히 기만하고 적당히 허풍을 떨며 살았죠.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하나도 알지 못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나는 정말 스스로 부끄러움 없는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그래서 이 사회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부정한 사회에 손가락질을 해대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에 기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러웠습니다.    


            



도망쳐도 괜찮아
     

한 번도 선택한 적 없이 살던 삶에서 도망쳐 나에게 꼭 맞는 위도를 찾아 나만의 자존의 섬에 닿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로 경험하고 진짜로 느끼며 진짜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친구인 외로움과 침묵을 이해하면 더 나은 소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멀찌감치 떨어지면 애증의 서울과 대한민국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저는 한국을 너무 사랑해서 떠난 거였어요.      


인간은 늘 떠나고 싶은 동시에 돌아가고 싶은 것 같습니다. 떠나야 돌아올 이유를 알게 되죠. 조용한 절망을 깨뜨리는 도끼처럼 저는 가끔씩 스스로를 굉장히 난처한 상황으로 던져 넣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 시즌에만 쏟아져 나오는 패션, IT, 예술계의 신상품 속에서도 반스 운동화에 청바지 한 벌, BYC 티셔츠만 돌려 입었던 저는 서울을 떠나 태국 남동부 작은 외딴섬으로 떠나며 캐리어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는 그렇게 살고 있어요.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소속 없이 살았던 삶이 저에게 준 교훈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데 그리 많은 게 필요하지 않아요.      



그동안 서울에서 편두통과 소화불량, 불면과 우울 등 현대인의 스트레스성 질환을 모두 껴안고 살았던 저에겐 너무 많이 노출된 자극을 줄이는 게 특효약이었어요. 더 이상 새로이 개봉한 영화나 발표된 앨범, 출간된 책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살피고 대중에게 뭐라도 아는 척하며, 사실은 광고주이면서 예술가의 탈을 쓴 브랜드와 결탁해 거짓을 말할 필요가 없으니 혼자만 알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들 먹고살려고 그렇게 사는데 너는 뭐가 그리 고고해서 그냥 넘어가질 못하냐”는 선배의 안타까움 넘치는 타박도 없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다니며 남들 다 하듯 적당히 참고 살지” 하는 엄마의 채근도 없습니다.      




주민세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낸 소로에게 그를 면회하러 찾아간 스승 에머슨이 묻습니다.   

   

“왜 그 안에 있느냐?”  

    

그러자 소로는 이렇게 에머슨에게 이렇게 묻죠.      


“스승님은 왜 거기 밖에 계십니까?”     




사회에서 사람들이 소위 ‘잘 나간다’고 말할 때, 엄마가 보기엔 ‘이렇게 성실히 직장 다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된다’고 느꼈을 때, 저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불안하고 불행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가 선택한 때, 내가 선택한 곳에서,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절실하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용기’라는 단어를 선물했지만, 저는 ‘도망’이란 단어를 스스로에 주었습니다. 문명 세계로부터 스스로 고립되어 그동안 해온 것을 모두 잊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결단은 저에겐 ‘용기’보단 ‘도망’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도망쳐도 괜찮아’라는 선물과 격려를 함께 캐리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계획도 없이 저는 서울을 떠났습니다.                




그저 떠내려가는 작은 배들을 바라보며
     

나만의 섬에 닿았을 때 저는 처음으로 인공적으로 꾸며진 초록이 아닌 진짜 자연 속에서 사는 삶의 경건함과 고귀함을 느꼈습니다.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의 생활은 간소화되고, 그 속에서 인간의 독특함이 빛을 발했습니다. 겸손, 용기, 관대함, 친절, 지혜 같은, 도시에서 책으로만 보던 단어들을 직접 실천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섬에 사는 태국인보다 전 세계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으로 모인 외국인들이 더 많은 커뮤니티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모든 주변 시선과 사람들은 그저 바다에 떠내려가는 작은 배들이었습니다.      


결혼, 사회생활, 직장생활, 가족생활, 자기 계발, 강요되는 행복 등 사회와 개인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길을 잃었던 저는 모두 돈에 미쳐 인간의 목숨이 파리보다 못한 서울을 빠져나와 나만의 섬에서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들을 비로소 하나씩 발견하며 채워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열린 북토크에서 많은 독자들이 저에게 ‘용기’를 말하더군요.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끝없는 경쟁으로 극단적 개인주의에 치닫고 일상이 사막화가 되면서 생활 리듬이 초가속화되었던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망친 저에게는 그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아가는 서울 사람들이 더 위대해 보인다고. 절대로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게 ‘용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 용기가 없어, 바로 그 용기를 얻기 위해 도망친 거고요.   

    

‘용기’가 없다고 해서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이곳이 싫으니 일단 벗어나고 볼래’ 하는 회피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나만의 섬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고 공부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면 사회적 규율이 정한 책임에선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하지만, 시스템을 벗어난 한 개인으로서 지게 되는 책임은 배로 커졌습니다.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내려 스스로 관찰하는 과정은 굉장히 험난하고 괴로웠습니다. 병든 사회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 ‘정상’으로 사는 사람이 저리 많은데 뭐가 그리 혼자 아프고 힘들다고 떼를 쓰는지, 그렇게 저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주홍글씨를 아주 오랫동안 꼬리표로 달고 다녔거든요.      


태어나 30년이 넘도록 늘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없을 땐 스스로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제 삶을 처음으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처단하는 시선을 거두고, 애처롭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을 떠나 저와는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한국인으로 나고 자랐기에 제 피부 아래 진득하게 자리 잡은 경쟁의식과 승부 근성, 인정받으려는 욕심,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수치스러워하는 성향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걸 이유로 서로 위로하며 문제를 회피하던 사회에서 벗어나니 제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한 한국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나만의 섬으로 떠나봐야, 변한 건 장소뿐이란 걸 알았습니다. 모순적인 상황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은 저항의 동물이니까요. 삶의 긴장과 독기를 빼고 스스로에게 관대하고 친절해지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도망’도 ‘용기’였네요.  


    



비로소 나만의 섬에서 실패하더라도 원인을 찾되 책임을 따져 묻는 버릇을 고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건 때론 놓아버릴 줄도 알고, 떠나는 사람들을 잡지 않으며, 정답을 찾으려 노력하되 쫓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친절해야 한다는 것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알게 됐죠. 관대하고 부드러운 파도와 달콤한 꿀, 그리고 필요할 땐 매운 고추를 제 인생에 적절히 균형을 이룬 향신료로 쓰게 되었습니다.                




자존의 섬으로 떠날 용기

나만의 섬을 ‘자만과 아집의 섬’이 아닌 ‘자존의 섬’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8 학군에 서울대 나온 사람들이 다 말아먹고 있는 한국의 정치, 법조, 행정, 언론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식당 테이블에 벨을 누르면 언제든 친절하게 달려오는 종업원과 로켓배송, 새벽배송을 한국의 자랑으로 삼기 전에 그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과로와 갑질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워낙 외진 시골이라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면 일주일은 기본적으로 기다리지만 전혀 사는 데 지장이 없는 나만의 섬에서 만난 유러피언 친구들은 자신의 나라라면 아무리 빠르고 편리한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의 인권과 노조를 통한 의사 표시 때문에 그런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 거라 말합니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K-팝 아이돌의 열풍은 한국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하고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 아이가 무대에 오르기 위해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고 합숙 생활을 하며 소속사의 엄격한 통제 하에 계약을 이행한다는 걸, 또 그걸 위해 한국의 수많은 학부모와 아이들은 오늘도 오디션을 보러 다닌다는 걸 유러피언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천박하다 조롱하며 더 이상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지 못하는 미국을 한국은 왜 그리도 절절히 짝사랑하는지, 왜 한국의 국내 정치 시위에 성조기가 등장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자들이 세금을 가장 적게 내면서도 조세저항은 제일 높은 나라 한국을 자신들은 세금을 많이 내지만 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는 체감할 수 있어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느리고 불편하지만 문화와 철학을 즐기며 사는 유러피언 친구들은 어쩌다 한국이 <기생충>과 <오징어게임>의 나라가 되었는지 묻습니다.     

 

다이빙 강사로 다이브 센터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너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저는 한국에서의 버릇을 한참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을’을 자처했습니다. 조직을 위해 희생하는 직장 문화에 익숙해진 버릇을 스스로 깨치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런 제 모습을 본 유러피안 친구들은 정색합니다. “노동자로서의 네 권리를 네가 주장하지 않으면 스스로 잃는 것”이란 말은 헌법에 문자로만 존재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걸 실천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니 단 한 번도 시도조차 못 했던 ‘인간’의 ‘권리’를 체감했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결혼하셨어요? 여자/남자친구 있어요?”   

  

“부모님은 뭐 하세요?”   

  

한국인이 초면에도 불구하고 들이붓는 질문입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섞인 커뮤니티에서 살다 보니 처음엔 저도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서 늘 받던 불편하고 무례한 질문들을 대화를 이어가 보려는 선의로 똑같이 다른 이에게 한 거죠. “나이가 어떻게 되냐”라는 질문에 친구들은 “우리가 좀 더 친해지면”, “여자/남자친구 있느냐”라는 질문엔 “나 게이인데”, “부모님은 뭐 하냐”는 질문엔 “난 부모님 없어”라는 답을 가끔 들으면 벽에 머리를 박으며 어리석은 저를 반성했습니다. 모든 걸 다 아는 듯 어른인 척하던 허영을 버리고 실수를 하면 깨끗이 인정하고 상대에게 사과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삶을 비로소 실천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깨치고 배우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유연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올해 저는 섬을 떠나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처음 그 섬에 들어갔을 때와 똑같이 훌륭한 이유로 섬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섬에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문명사회로 돌아가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믿었고, 이제 저는 한국에서 살아도 나만의 건실한 섬에서 어떤 흔들림에도 상관없이 중심을 잘 잡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머리로 아는 걸 실천할 수 있는 용감하고 다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에 또다시 나만의 섬을 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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