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느슨하게 움직이는 삶

나는 방광암인 남자와 결혼했다.

by 쌀방언니

“여보~”

“응, 왜?”

“나 정신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정신 병원? 왜?”

“나 아이들이 전혀 이쁘지 않아.”


그랬다, 나는 더 이상 나의 아이들이 이쁘지 않았다.

그날도 헐크 같은 나의 또 다른 인격체가 나와 아이들에게 소리지르고 악쓰고 윽박지르고.

나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는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고 겨우 아이들을 재웠다.

아이들은 자는 모습이 가장 이쁘다고 하는데, 나는 잠든 아이들조차 전혀 이뻐보이지 않았다.

곤히 잠들 아이들 얼굴을 머리부터 이마, 코, 입 순으로 찬찬히 살펴봤다.

그런데 내 입에선 깊은 한숨만 나오고 ‘이 아이들은 나를 힘들게 하려고 태어난 존재’라는 생각만 자꾸 맴돌았다.


헐크같은 인격체가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도 충격이지만, 세 번이나 배를 째서 낳은 아이들에게 모성애가 없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이었다.

‘모성애’ 라는 건 아이를 임신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인줄 알았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모성애는 자연스레 점점 더 커지는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자는 아이들 얼굴조차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린다.

엄마 자격이 없는 사람이 엄마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머리를 괴고 있는 손등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나 미쳐가고 있는 것 같아.”

남편은 말없이 내 말을 듣고는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금과 같은 생각이 든다면 함께 병원에 가보자고 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산후우울증이었다.


내가 산후우울증을 겪는 동안,

남편은 새로운 일에 대한 호기심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힘든 내색 없이 일을 했지만, 부족한 수면 시간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콩나물 배달이 매일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배달을 마치고, 출근해야 하는 날에는 그 피로감이 더했다.


그날도 남편은 배달할 콩나물을 싣고 믹스 커피를 한잔 타서 배달지로 출발했다.

잠을 쫓을 생각으로 커피를 한 모금 입 안에 넣고 정면을 바라본 순간 동그란 두 눈과 마주치면서 ‘쿵’하고 무언가 트럭에 부딪혔다.

‘동그란 두 눈’ 순간, 사람의 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

‘가족’ 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오르면서 커피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무섭게 뛰었고, '

왜 하필 그때 커피를 마셨는지', '왜 이길로 왔는지', 복잡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쳤다.

남편은 그대로 브레이클 밟았다.

입술과 손, 온몸이 떨리고 머리카락이 쭈뼛 선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 무언가가 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은 차 앞쪽으로 가서 몸을 숙여 바닥을 확인했다.

차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빠르게 차 주위를 살펴봤다. 아무것도 없다.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차 밑과 더 넓은 반경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다.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방금 스쳐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았다. 노루 한 마리가 껑충 뛰어 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방금 남편과 마주친 두 눈은 노루의 눈이었던 것이다.


남편은 차를 몰아 갓길에 겨우 세웠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한 번 더 도로를 확인하고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노루여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분명 그때 우린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힘든 와중에도 우리는 시골 생활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미세하지만 시골 생활에 '만족감' 이라는 아지랑이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보며 남편은 언제 수확하는 건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배웠어.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니 좀 더 있어야해.” 라며 천진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노동과 육아로 육체는 비록 힘들었지만, 이런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워짐을 느꼈다.


시골로 내려와 처음으로 ‘시골 내려오길 잘했다, 시골이 좋다,’ 라고 느꼈을 때는, 하늘을 한참동안 바라본 날이었다.

엽서에 담긴 사진 한 장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도시에서 하늘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하루하루를 쫓기듯 촉박하게 살았다.

그런 나에게 여유롭게 하늘을 볼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보다는 하늘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시골에 와서 나는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집 앞 작은 텃밭에 고추, 오이, 방울토마토, 키우고 싶은 건 무엇이든 키울 수 있었다.

우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사모예드 토토와 레브라도 리트리버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가끔 아이들은 아빠가 일하는 논으로 가서 이앙기도 타고 모판도 날라주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온가족이 토토와 쿠찌를 데리고 산책하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맛있는 것을 사와 함께 먹었다.

출근 때문에 100일 동안밖에 먹일 수 없었던 모유를 셋째 때는 완모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아파도 당장 달려갈 수 없었던 그때와 다르게 나는 늘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점점 내 마음은 평온해졌으며 느슨하게 움직였다.

이건 풍족한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닌 마음의 여유에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힘든 시골 생활을 웃으며 넘기는 힘을 주었다. 물론 나의 긍정적인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우리의 시골 생활은 힘겨움과 만족감을 오가며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기검진 날이 왔다.

앞에 했던 두 번의 정기검진을 우리는 무사히 잘 넘겼다.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 증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정기검진을 하는 날은 두려움과 긴장감이 맴돌았다.

검사가 끝나고 담당 의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수술 날짜 잡으세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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