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그의 시점) 33. 붙잡을까. 지금?
오늘따라 유난히 따가운 햇살이다. 필리핀의 더위는 이제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유난히 오늘은 눈살이 찌푸려진다.
터벅터벅 다이닝 한편의 사무실로 가서 일지를 살펴봤다.
그녀가 여기 머물 수 있는 날도 이제 3일. 리조트에서는 하루 반나절 밖에 안 남았다.
'가지 말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네'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서툰 고백으로 그녀가 날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건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이 든 것도 한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을 말하는 게 여러 말이 필요할까..?
하지만 내 경우는 그저 '좋아해'라고 한마디만 필요한 게 아니니.. 두려운 마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가가고 싶어..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푸릇푸릇한 초록빛이 가득하고 반짝이는 바다 풍경도
너무 익숙하게만 흘러갔던 내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내 심장이 말도 못 하게 뛰고 내 시선은 그녀를 쫓아가기만 했다.
아.. 사람들이 왜 이 리조트에서 로맨스를 찾으려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한 곳이다.
그전에 그녀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겠지만....
마음이 혼잡하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몰라.
하.. 담배나 하나 펴야겠다.'
끊으려고 벌써 몇 달째 참고 있었는데 …. 심난하니까 안 되겠다.
그녀가 멀리서부터 다이닝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 얼굴 보면 또 긴장될 것 같은데..'
내가 보이지 않았는지 벽 한쪽에 걸려있던 액자를 뚫어져라 봤다.
100회 다이빙 기념 액자.
여러 사람들이 여기서 100회 다이빙을 하고 이름을 새겼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이 좋아서…다이빙이 좋아서 머물게 된 곳.
근데 이곳에서 내가 여자에게 이토록 빠져 버릴 줄.
- 굿모닝. 뭐 봐요?
아무 일 없는 듯이 다가가자.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넣을까 하다. 안 돼 , 긴장돼서 이거라도 들고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녀에게 멀리 떨어져서 담배를 물었다.
- 아 담배 피우는구나?
‘?!‘
- 아.. 담배 피우는 남자 싫어요?
내심 아차 싶었다. 분명 싫어하니까 그렇게 물은 거일 텐데..
-좋진 않아.
‘아.. 망할..’
안 돼.. 여기서 담배를 다시 넣으면 너무 의식하는 것 같잖아.
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화제를 돌려야 했다.
-100회 다이빙하면 저기에 이름 새겨주거든요 3년 전에 나도 그랬고 저기 저위에
- 이름이 있네?
- 누나도 저기 이름 새기고 싶어요?
-그럼 뿌듯하겠다
- 여기 또 와야 되는데
-그렇게 되나?
‘정말? 정말 오려고?’
- 오면 좋겠다.. 벌써 마지막 날인가?
- 벌써 그렇게 됐네
실망감과 섭섭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담배를 피우다 나도 모르게 깊게 내쉬어 버렸다.
- 어 연기가 그쪽으로 가네. 미안
담배 피우는 게 싫으면 연기도 싫을 텐데.. 아.. 담배 피우지 말걸. 괜히 꺼냈다.
그녀는 아무래도 100회 다이빙에 관심이 생긴 듯했다.
다이빙이 좋아졌나? 아님 … 나 때문에 온다는 건 아니겠지..
아 맞다. 그녀는 아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이걸로 만회가 될까?
- 아침에는 아아 맞죠?
- 아 땡큐.. 근데.. 어제는 잘 잤어? 엄청 취했었잖아
‘갑자기 그걸 묻는다고? 어떻게 말해야 하지..’
- 아.. 취했었죠 많이.
전혀 취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져서 문제였지
- 취하긴 했어도 다 기억은 해요
‘ 지금이 타이밍일까?’
- 응 뭐를?
하.. 또 모르는 척.. 잊어버린 척..
그래도 부딪혀 보자.
- 나 아직 대답 못 들었는데..
……
저기..
불청객의 목소리
- 와~ 오늘 날씨 너무 좋다 오빠
어젯밤에 잘 잤어요? 영화 보다가 갑자기 가버리기 있기 없기~
‘앗.. 갑자기 그걸 왜 말하는데’
- 아..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리고 네가 이상하게 굴었잖아.
- 오빠 나도 커피 타주면 안 돼요?
‘커피 타주고 빨리 보내버리자’
- 아이스커피?
-음 더우니까 아이스 나 몸이 왜 이렇게 덥지?
- 그럼 에어컨 나오는 방에 가서 마셔.
- 오빠 오늘 브런치 메뉴는 뭐예요?
그만 좀 말 시키고 방으로 들어갔으면… 그녀와 난 아직 할 이야기가 있다고!
- 오빠 같이 영화 끝까지 보고 싶었는데 중간에 그냥 가버려서 나 좀 당황했잖아? 내가 그렇게 만든 거야?
- .... 왜 귀에 대고 말하는데?!
제이의 행동이 짜증이 났다.
제이는 돌발행동을 너무 자주 한다.
영화를 볼 때도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길래 그 자리를 떴다.
소민누나가 중간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이상하게 오해하면 어쩌지? 안 그래도 그녀는 내가 바람둥이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뭐 때문인지 모르지만.
- 꺄! 벌레야 벌레!!
호들갑스러운 제이가 이번은 소리를 질러댔다.
도마뱀을 보고 벌레라고 난리를 쳤다.
소민누나가 쯧쯧대며 걸어 들어왔다.
나는 도마뱀을 얼른 치워 제이가 소리치는 걸 그만두게 해야 했다.
- 필리핀에는 귀여운 도마뱀이 많아~~
소민누나가 혀를 쯔쯔 차며 다이닝으로 걸어왔다.
'귀여운...'
하 또 전날 밤 일이 떠올랐다.
'너무 신경 쓰인다..'
그녀가 쳐다보는 곳이 내가 아니라 저 먼바다 쪽이라는 게 더 신경 쓰인다.
자꾸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전혀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훗... 나 혼자 착각 속에 빠졌던 걸까..'
어이없다는 생각에 괜한 헛웃음만 나왔다.
" 야~~ 그 제이 말이야~ 은근 밀당의 천재여~ 장난 아니야. 하 놔~ 질투심 유발 한번 해봐?
소민누나는 임자 있고.. 진아 누나를 좀 이용해 볼까??"
갑자기 어젯밤 준호 형의 말이 떠올랐다.
진아누나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형에게 신신당부를 했었다.
형은 내 눈치를 보고는 이내 수그러들었지만..
'가만.. 질투심 유발? '
그걸 내가 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게 과연 먹힐까?
진짜 통한다면 그녀가 날 한 번은 돌아봐줄까?
제이가 타운을 나가자고 졸랐다.
내키지 않았지만... 미안하지만 제이를 좀 이용해 볼까 하는 나쁜 생각이 들었다.
혹여나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나쁜 남자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는 거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마음 좀 얻겠다는데...
내가 운전을 해주겠다고 하고 다 같이 나가자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같이 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그녀가 날 한번 봐줄까.
제이가 아닌 그녀가 방으로 향해 가버렸다. 붙잡을까?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