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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Aug 04. 2020

엄마와 나는 발가락도 닮았다

실은 몰랐던 엄마의 모습

내 고향은 은행나무집에서 차로 5시간 넘게 떨어진 곳이다. 도로가 좋아지기 전에는 굽은 길을 지나고 지나 6~7시간이 걸렸다. 어린 시절 동생과 내게는 그 길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다. 명절 대이동을 할 때면 좀이 쑤셔 우는 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뒷 좌석에 박스를 깔아 만든 간이침대나 한 때 열광했던 god의 카세트테이프, 휴게소의 알감자와 맥반석 오징어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 먼 길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먼 그 길을 엄마는 어떻게 왔을까. 젊을 때 서울에 잠시 살았다는 이야기 말고는 엄마의 20대에 대해 알지 못했다.  아, 직장을 찾아 내려왔다고 했던가. 생각해보면 그동안 엄마에 대해 별로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는 은행나무집에서 지내며 그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는 질문만큼 좋은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문득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왜 고향을 떠났어?" 


내 질문에 엄마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해본 적 없는 독립적인 엄마의 모험담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20대 초 중반이면 결혼을 하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울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 사는 25살의 엄마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냈단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던 엄마는 혼담을 피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로 달려갔다. 서울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려는 목적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연고 없는 내 고향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엄마는 스스로 결정했고 떠났고, 지금의 엄마를 일궜다. 



엄마의 도피생활은 사실 지금의 모습과 잘 매칭 되지 않는다. 내가 보는 엄마는 결단력이 있기보다는 조금 우유부단한 사람이다. 좋고 싫음이 명확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춰주는. 언제나 부지런한 엄마는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쩌면 내가 엄마를 잘 못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속을 잘 생각해보지 않고, 또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엄마의 모습을 정한 것일지도.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단 한 번 가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지방 소도시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태권도를 좋아했다는 외향적인 엄마, 문학소녀였지만 수학은 못했다는 엄마, 더 넓은 세상을 꿈꾸던 엄마. 엄마가 졸업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속에 남아있는 모습은 이제 보니 나와 많이 닮았다. 다섯 개 발가락 중 둘째가 제일 길고, 조금만 스쳐도 멍이 잘 든다. 꾸미는 데는 관심도 소질도 없지만, 자연을 보면서 걷는 것은 참 좋아하는. 아침잠이 많고, 틈만 나면 동물과 식물에게 말을 거는 나는 엄마를 닮았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는 이런 사소한 공통점을 아는데 참 오래도 걸렸다. 나를 향한 엄마의 관심, 엄마를 향한 나의 궁금증의 크기가 많이 다르기에 엄마를 알기가 어렵다. 나와 달리 엄마는 지금도 나를 궁금해한다. 기분은 어떤지, 뭘 먹고 싶은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내 생각을 하는 것까지도 엄마의 일과인 것 같다. 닮은 점을 찾고 또 다른 점을 찾으며 그 모든 것을 응원하고 품는 것이 엄마가 사랑하는 방식이다. 오늘은 나도 어설프게 엄마를 따라 해 본다. 엄마 그 자체가 멋있다고. 엄마와 닮은 내가 좋다고 말을 건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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