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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30. 2020

어쩌다 보니 보호자

엄마가 아픈 뒤 달라진 것들

엄마가 환자가 되면서 나는 절로 보호자가 됐다. 평생 불린 이름과 회사의 직급, 배우자가 부르는 애칭, 딸, 학생, 아가씨, 이모, 며느리까지 그동안 나를 지칭한 많은 호칭에 새로 더해진 또 하나의 역할이었다.


저절로 생겨난 이 호칭은 원해서 얻었던 것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취직으로 얻어낸 직급이나 결혼을 하면서 따라온 호칭들은 내게 선택권이 있었지만, ‘보호자’는 그렇지 않았다. 원치 않게 찾아온 병과 같았다.


나는 이 호칭을 싫어하면서도 또 금방 익숙해졌다. 엄마가 수술방에 들어갔을 때부터 퇴원 후 외래진료를 다니는 지금까지 숱하게 들어온 탓이다. 병원에서는 항상 보호자를 먼저 찾았다. 진료 접수를 할 때 의례 “보호자이세요?”라는 물음이 있었고, 엄마가 한 발 앞서 접수창구에 가는 날이면 “보호자는 안 오셨어요?”라는 질문으로 내용만 바뀌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보호자 없이 혼자 오는 환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속으로 반복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에게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하거나 엄마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고, 또 다음 외래까지 지켜야 할 수칙을 외우고 지킬 수 있도록 독려하는 역할 등을 맡겼다. 그렇게 주어진 역할은 보호자로 불리지 않는 병원 밖에서도 엄마를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으로 굳어졌다. 보호자가 된 이상 나는 엄마의 건강 회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 엄마와 있을 때는 그동안 내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어쩌다 돼버린 보호자지만 역시나 호칭은 거저 얻어지지 않는 법이다.


보호자가 된 뒤로 소소하게 달라진 점이라면 잔소리의 주객전도다. ‘이걸 더 먹어야 한다,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 무리해서 일 하면 안 된다, 낮잠을 자야 한다….’ 눈 떴을 때부터 감을 때까지 잔소리는 계속됐다. 사실 엄마는 어렸을 때도 잔소리가 없는 편이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엄마를 뛰어넘는 잔소리꾼이 되기로 했고 실제로도 이뤄냈다. 엄마도 이런 상황이 싫지는 않은 듯 권하는 운동을 즐겨 따라 했고, 몸에 좋다고 차려낸 음식도 기쁘게 먹었다.


그날의 기분과 컨디션을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아침에 엄마 상태가 좋지 않으면 산책 대신 가벼운 운동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거나,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음악을 틀어주는 식이었다. 통증이 심할 때는 등을 가볍게 쓸어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것도 보호자의 역할이다. 혹시나 엄마가 우울해할까 봐 챙겨갔던 소소한 미용용품들도 도움이 됐다. 나만의 샵을 열어 손발톱을 손질해 줄 때면 엄마는 세상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보호자란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하자는 대로 따르는 엄마를 보며 헛헛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엄마는 그만의 방식대로 60년을 살았다. 직업으로 사회에 헌신했고 가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아내이자 엄마였다. 엄마는 쉰이 넘어서도 쉼 없이 꿈을 꿨다. 다들 어렵다했지만 결국 환갑을 몇 해 앞두고 대학과 대학원을 차례로 졸업하며 우리 집 최고 고학력자가 됐다. 누구보다 주체적이었던 엄마의 삶을 생각하니 내 잔소리까지 달게 들어야 하는 지금의 몸상태가 서글퍼졌다.


엄마를 챙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하는 나에게 어느 날 남편은 회사 선배에게 들은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바뀌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지금이 그때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언젠가는 다가올 일이 조금 빨라졌을 뿐이라지만, 아직은 큰 산이었던 엄마가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철없는 나는 엄마얼른 이 병을 벗어던지고 보호자 역할을 좀 더 해줬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을 텐데, 그 날이 가급적 늦게 왔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나는 엄마와 아빠만큼 좋은 보호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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