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진정한 미국 힙합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전까지 '듀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음악을 통해서 흑인음악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으나 실제 미국에서 활동하는 래퍼들의 진짜 힙합 음악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지인에게 힙합 앨범 몇 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스눕독, 닥터드레, 투팍 등 유명 래퍼의 앨범을 받아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되었다. 몸속에 있는 아드레날린이 엄청나게 분비되면서 머리카락이 전부 다 서는 전율감이 느껴졌다. 내가 직접 이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란 탓에 학교 음악 실습시간에 노래를 할 때는 목소리가 떨려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고 악기를 연주할 때는 손이 떨려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 힙합 음악을 처음 듣고 따라 할 때는 왠지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당시에는 하이텔, 나우누리 등을 통해서 힙합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시점이었다. MC메타, 주석 등 당시 커뮤니티 활동을 주도했던 래퍼들이 향후 한국 힙합 음악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도 교회에서 나처럼 힙합 음악을 좋아하는 동생들과 함께 모여 랩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함께 음악도 듣고 스스로 작사를 해서 랩을 하며 몇 년간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구청에서 공익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힙합 음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나와 뜻이 잘 맞는 동생 한 명과 그룹 이름을 정하고 우리가 만든 노래에 맞춰 객원싱어를 구하기로 했다.
나와 같이 음악을 시작한 동생은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작곡을 위한 컴퓨터와 장비를 구매해서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노래가 꽤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곡 세 개를 골라서 각자 파트를 정하고 작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노래를 잘하는 동생들을 객원싱어로 불러 연습을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노래를 하지 않았다 보니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싱어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때 내가 근무하던 구청에 나와 나이가 같은 새로운 공익근무요원이 들어왔다. 그리고 회식 날 노래방을 갔는데 그 친구가 박효신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모두가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부터 그 친구를 우리 그룹의 싱어로 정하고 전에 음악을 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잘해서 기획사 오디션도 보고 한때 박효신, 박화요비 등이 있는 기획사에서 가수에 대한 제의도 받았었다.
그런데 음악성보다는 외모를 너무 중요시하는 기획사의 행태에 불만이 생겨 모두 중단하고 지금은 윈앰프를 통해서 음악방송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가 하는 음악에 대해 설명하고 싱어를 제안했다. 물론 그 친구도 음악활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룹의 완전체를 구성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모여서 연습을 했다.
우리는 힙합 음악을 제대로 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우선 앨범을 녹음하고 유명한 클럽에 보내기로 했다. 1차 오디션에 통과하면 2차 오디션은 실제 클럽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연습실을 구해서 공연 때까지 트레이닝을 하기로 했다. 2차 오디션도 통과하면 클럽에서 매주 공연할 수 있는 그룹이 되고 그러면 클럽에서 만드는 앨범에도 참여할 수가 있다. 그리고 반응이 좋으면 우리만의 앨범도 발매하고 뮤직비디오도 만들어서 힙합 뮤지션으로 활동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공중파 음악방송에는 진정한 힙합 음악을 하는 가수가 없었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로 불려지는 클럽에서 스탠딩 라이브 공연을 하는 것이 진짜 힙합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방법이었다. 특히 신촌에 있던 마스터플랜(MP)에서 공연하는 래퍼들이 대한민국 최고의 힙합 뮤지션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마스터플랜 오디션을 보기로 하고 분당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 음반 녹음을 예약했다. 당일 3시간 안에 3곡의 녹음을 완료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정식 녹음실에서 처음 작업을 하다 보니 긴장도 하게 되고 제대로 된 실력이 바로 나오질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고 결국 밤 11시가 넘어 모든 노래의 녹음 작업이 끝났다. 우리는 그 CD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함께 들으며 밤새 감동을 느꼈다. 우리가 태어나서 처음 만든 우리만의 앨범이라고 생각하니 노래를 들을 때마다 더욱 큰 감동이 느껴졌다.
다음날 우리의 앨범을 마스터플랜 주소지로 발송했다. 그리고 긴장된 약 2주간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연락이 왔다. 1차 오디션은 통과했고 실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 약 2주 후 열리는 클럽 공연에서 오프닝 공연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2차 오디션인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홍대 앞에 있는 연습실에서 거의 매일 모여 몇 시간씩 연습을 했다. 그토록 바라던 마스터플랜에서의 공연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기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드디어 공연 날이 되었다. 너무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지 아침부터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부터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고 오후가 되자 컨디션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공연시간은 저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리 공연장 근처에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가사를 잊어버릴까 봐 외우고 또 외우고 함께 작은 목소리로 연습을 했다. 우리의 오프닝 공연이 끝나면 다음 순서로 인피닛 플로우, 데프콘, 주석 등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 준비가 모두 끝나고 드디어 우리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관객들이 공연장 전체를 채우고 있었고 꿈에 그리던 우리만의 공연을 하게 되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긴장감이 심했는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서 공연을 시작하니 긴장감보다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스스로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랩을 할 때는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 순간을 즐기게 되었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적성을 찾았을 때의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큰 실수 없이 공연을 마치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공연할 때 느꼈던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무대 뒤에서 다른 래퍼들의 공연을 보고 역사적인 하루를 마감했다. 공연을 하기 전에는 사실 자신감이 크질 않았지만 공연이 잘 끝나고 나니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후 드디어 마스터플랜에서 연락이 왔다. 기대를 했지만 안타깝게도 2차 오디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이고 어떤 부분을 보완해야 하는지 객관적인 평가를 들을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MC메타가 압구정동에 만든 힙합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오디션을 한번 보았는데 마찬가지로 합격은 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교 3학년 복학시기가 다가오면서 나는 음악을 계속할지 학교에 가야 할지 선택을 해야 했다. 객관적으로 오디션을 통해 판단을 받았을 때 학업을 포기하며 음악을 계속할 경우의 앞날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학교에 복학을 했고 음악은 공무원에 합격하고 난 후 다시 하기로 다짐했다.
비록 아직까지 다시 음악을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때 했던 음악활동이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결혼식 때도 아내를 위해서 내가 직접 랩을 하는 축가를 해서 아내에게 정말 좋은 추억을 선물했고 회사에 들어와서도 회식 때마다 노래방에서 랩으로 히트 친 걸 생각하면 나에게 정말 잘 맞는 특기 하나를 얻은 것이니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남은 소망은 언젠가 힙합 공연을 할 수 있는 카페를 내가 직접 만들어서 한 달에 한 번쯤은 예전에 같이 했던 그룹 멤버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