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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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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Aug 27.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냈다. 인생 처음 겪은 지독한 상실이었다. 어떤 것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더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았다. 더는 무엇도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그저 오늘을 살게 할 일상의 작은 조각이라도 찾으려는 허덕임만이 존재했다. 그 무엇도 나를 채울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만이 그와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지속될 것 같았다. 아니, 영원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일상에는 그도 없었고 나도 없었다. 흘러가는 시간만이 존재했다.


남들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오랜 친구 앞에서도 마음을 나눈 상대에게도 더 밝은 모습을 연기했다. 필사적이었다. 짧게 울고 털어낸 것처럼, 그 시간이 벌써 지나가버린 것처럼 행동했다. 누구도 괜찮으냐 함부로 묻지 않았지만 내가 먼저 웃어 보였다. 그런다 한들 감춰지지 않는 내 그늘이 그들에게도 드리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무력했다. 누구든 붙잡고 쏟아낸다고 달라질 것도 의미도 없어 보였다. 홀로 껴안아야 할 슬픔이었다. 그 아픔을 들추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직업적으로 이루고 싶은 성공도 없었고 내가 그릴 수 있는 미래란 없었다. 유일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와 함께한 세월 이상으로 아픔이 지속되리란 것이었다. 나를 놓지 않으려면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둘 작은 이유라도 찾아야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은 보이지 않고 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그대로 두면 미쳐버릴까 봐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무엇이든 붙잡아야 했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한 일은 스스로도 빠르게 회복한 것처럼 느끼게 할 만큼 나를 일종의 몰입 상태에 있는 듯 착각하게 했다. 그 착각 속에서 매일 밤, 내일을 위해 조금만 울면서 눈물을 감췄다. 더욱더 정신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아무 음식이나 먹었고 나를 방치했다.


그러다 결국 탈이 났다. 그제야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퇴근길의 일이었다. 지하철에서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공격을 당했다. 뉴스에서만 보던 '묻지마 폭행'이었다.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알았다. '여기까지구나. 더는 버틸 수 없겠구나.' 일상을 깨뜨린 충격은 그동안 넘어지지 않으려 애써 온 노력들을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뜨렸다.


불행은 같이 온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원망했다. 평소라면, 평소였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대상 없는 책임을 찾으며 잠깐의 부정의 시간이 있었다. 결국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눈을 가리고 달릴 것이 아니라 멈춰야 하는 때라고.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넘어져야 한다고. 그래야 덜 다친다고. 넘어지는 법을 몰라 더 큰 상처가 생겼다.


참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오랜 시간 멈춰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바랐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나아질 거라 믿지 않았지만, 세월 속에 슬픔도 조금은 옅어질 것이라는 실낱같은 부여잡음이 있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라고, 그 말에 기대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나는 시간에 몸을 맡겼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제 역할에 충실했다. 나는 삶에서 멀어진 채 시간은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문득 '내가 세상을 떠난다면'이라는 의문을 스스로 던졌다. 곧 내가 떠나고 남겨질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짐으로 느껴졌다. 내 흔적이 담긴 물건은 작은 것이라도 남은 사람들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래서 하나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 떠나도 가벼이 떠날 수 있도록. 모든 흔적을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짐을 조금은 덜어주고 싶었다. 조금은 덜 아플 수 있도록.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삶을 다시 내게로 끌어오기 시작했다. 방치해 왔던 몸과 마음을 온 정성을 다해 돌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의 일상을 꾸리며 나를 살아가게 할 힘을 내 안에서 찾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고 누구도 나를 변화시킬 수 없고 무엇도 나의 생을 뒤흔들 수 없으리라. 나는 이제야 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비로소 오늘을 살아간다.








나와 같은 아픔을 가진 그대에게,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당신께,

나와 다르지 않은 이들에게.


모두 지나간다는 잔인한 말은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나 역시 그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 시간에서 애써 벗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언젠가 반드시 당신에게도

오늘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노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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