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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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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17. 2023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는 사람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거진 일 년 만에 보는 친구. 얼굴만 봐도 좋은 사람이다. 오랜만에 봐도 어제 본 것 같은 편안한 사이지만,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 혼자 신경 쓰이는 게 한 가지 있었다.


이날도 세수만 하고 머리는 대충 묶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갈 참이었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겠지만, 나는 원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고 외출을 하던 사람이었다. 친한 친구들을 만날 때도 당연했다. 일찍이 화장하고 머리하는 걸 좋아했던 사람인지라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수더분하게 바뀐 내 모습에 놀라진 않을까 자못 신경이 쓰였다. 못 본 사이 나는 여러모로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소꿉친구라 부끄러울 건 없어도 나 역시 민낯을 보이는 건 성인이 되어서는 처음이라 괜스레 어색했던 모양이다.


나도 아직 거울 속 내 모습이 낯설진대 하물며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의 눈에는 오죽하겠는가. 직장 내에서도 긴 머리를 짧게 자르기만 해도 심경의 변화를 물어오는 게 일반적인 반응 아니던가. 대개 사람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호기심을 참기 어렵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내가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다고 하자 친구는 피부가 건조하지 않은지만 궁금해할 뿐 별다른 말이 없다. 내가 잠시 이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잊고 있었구나. 이 친구의 장점 중 하나는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가까운 사이일수록 바뀐 헤어스타일이나 패션에 대한 이야기로 관심을 표하거나 안부 인사를 건네곤 하지만, 이 친구는 다르다.


상대가 먼저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상대가 무슨 머리를 해도 어떤 옷을 입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 내가 내 입으로 말을 하면 그제야 내 말에 맞장구를 치거나 한두 마디 거드는 게 전부다. 친구의 이런 행동에는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나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터다. 그게 이 친구가 인간관계에서 지키고 있는 선인 듯하다.


이 친구의 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내가 이제는 카페도 즐겨 가지 않고 차도 마시지 않아도, 간소한 물건만 가지고 살아도, 기름도 설탕도 먹지 않는 까다로운 채식을 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봐준다는 것이다. 부러 말로 표현하진 않아도 내 선택들에 대해 ‘네가 좋다면’이라는 뭉근한 시선으로 지켜 봐준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나는 늘 무장 해제가 된다. ‘아, 나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지.’ 나는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 우리가 만났던 그 시절 그때로. 나를 가리고 있던 허울을 벗어던지고 활짝 웃는다.


이 친구 앞에서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한 세월의 깊이 때문만은 아닐 터다. 지금 앞에 있는 서로에게 집중하려는 노력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을 안다. 그 마음과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실로 존중받고 있구나, 사랑받고 있구나를 온정의 침묵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미처 나에게 주지 못하고 있던 존중과 사랑을 친구에게서 담뿍 받아 왔다. 2시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충만했던 만남. 낯간지러운 말은 싫어하고 안 하는 친구지만 누구보다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본인은 알까.


있는 그대로 나를 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복이다. 친구 덕분에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사랑하자고 북돋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받길 원한다. 그 사랑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은 먼저 내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의 기본자세가 아닐까.






끝으로 친구와 나눴던 대화 중에 인상적이었던 말을 남겨 본다.


“내가 만족을 느끼는 그릇이 점점 작아져”

“작아진다기보다 네가 원하는 걸 아는 게 아닐까?”


그래, 크기가 무슨 상관이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살아가면 그만이지. 또 한 수 배웠구나.


어느새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버린 친구. 내가 입으로만 운동을 얘기할 때부터 친구는 운동을 시작해 꾸준한 습관을 들여왔다. 최근엔 요가도 하고 명상도 계속해 오고 있다고 한다. 친구의 여유로움과 안정감은 아마도 건강한 습관에서 나오는 힘이지 싶다.


나도 너의 언덕이 되어 주리라.

오랜 벗에게 존경과 사랑을 담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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