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음식을 먹어야지."
"신토불이가 좋은 것이여."
'아니, 요즘 같은 글로벌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니야?' 고리타분한 어른들의 생각. 국적의 경계 없이 넘나드는 해외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시대에 너무 갇혀 있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신토불이, 국내산을 강조하는 풍토는 우리 것만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것 같았다. 그러다 자연식물식을 접하고 건강한 먹거리란 무엇인가를 공부하며, 갇혀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의 무지와 편견이었음을 깨달았다. ‘어른들의 말씀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음식에도 때가 있다. 모든 음식에는 나고 자라기 알맞은 시기, '철'이 있다. 제철 음식은 때에 맞는 영양분을 가져다준다. 시원한 여름 과일과 채소는 더운 여름 몸의 열을 낮춰 주고, 겨울 채소는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겨울에 형형색색의 채소가 가득한 밥상은 자연스럽지 않다. 겨울에는 무, 배추, 시금치만으로도 충분한 영양을 보충할 수 있다. 음식이 가장 신선할 때 먹으며 계절에 맞는 영양을 섭취하는 것. 제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에 가깝다.
이제는 여름 과일인 참외가 이른 봄부터 나오고, 봄 과일이었던 딸기도 추운 겨울이 제철이라 불린다. 여름에만 먹을 수 있었던 시원한 수박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 계절의 구분 없이 맛보려는 소비자의 욕심, 그에 따라 더 비싼 값을 치르기 위해 앞다퉈 생산하는 농가. 한 겨울 온실을 키워 생산하는 하우스 재배에는 많은 전력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미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우리는 왜 더 빨리, 더 먼저 맛보려고 할까? 조금도 기다리지 않아도 돈과 기술로 모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까? 흐려져만 가는 제철의 경계에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우리 땅의 자연스러운 먹거리가 지켜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노지에서 키운 제철 먹거리를 소비하는 것이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도 줄일 수 있는 길이다.
자연식물식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밥상 사진을 살펴보면 제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한 겨울에 여름 채소인 오이와 상추가 등장한다. 그냥 채소만 잘 챙겨 먹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갖가지 채소가 넘쳐난다. 상추, 깻잎 같은 쌈 채소는 사계절 내내 만날 수 있다. 마트 진열대 앞에서 장 보기 초보는 어떤 채소가 제철인지 도통 구분하기 힘들다. 마트가 아닌 시장으로 발길을 돌리자 제철 음식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시장에 가면 신선한 제철 과일과 채소를 값싼 가격에 살 수 있으니 식비도 절약할 수 있다. 후한 시장 인심은 덤이다. 친절한 채소 가게 사장님을 발견하여 단골로 눈도장을 찍어 보자. 오늘 들어온 싱싱한 채소가 무엇인지, 이 나물은 어떻게 요리해 먹는지와 같은 마트 계산대에서는 들을 수 없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시장에서 장 보기가 어렵다면 농산물 직거래를 추천한다. 온라인 주문으로 농장에서 직송으로 신선한 농산물을 배송받을 수 있다. 자세한 방법은 전편을 참고할 것.
장을 볼 때 산지 소비를 원칙으로 한다. 수입 과일과 채소는 되도록 구입하지 않는다. 자연식물식 하면 손쉽게 먹기 좋은 바나나를 떠올리기 쉽다. 자연식물식을 시작한 초반에는 바나나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 바나나는 음식물 쓰레기도 많이 나오는 데다, 수입 과일이 먼 한국 땅까지 오면서 상하지 않고 어떻게 도착했는지를 알고 나니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아 졌다. 수입 농산물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약품 처리를 할뿐더러 생산, 유통 과정에서 불공정 거래가 빈번히 발생하고 이동 시 과도한 탄소를 배출시킨다.
국내에서도 바나나를 재배하는 농가가 있다. 바나나가 먹고 싶다면 국내산 바나나를 소비하는 건 어떨까? 또, 수입 오렌지 대신 봄이 되면 제주에서 생산되는 천혜향, 카라향, 하귤 등 다양한 만감류를 즐길 수 있다. 블루베리도 국내에서 재배된다고 하니 이왕이면 국내산 블루베리를 맛보자. 생산자의 말에 의하면 '갓 딴 블루베리가 가장 맛있다.'
제철음식학과 새내기
그동안 내가 아는 제철음식이라고는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 가을에는 밤, 겨울에는 귤이 전부였다. 감자는 여름에, 고구마는 가을에 수확되고 시금치와 당근은 겨울 채소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봄나물인 유채, 취나물을 맛보며 이렇게 맛있는 채소가 있다며 봄의 향연에 감탄했다. 여름에는 내 손으로 직접 완두콩과 옥수수 껍질도 까 보았다. '계절의 맛'을 이제 막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제철음식학과' 새내기다. 접하지 못한 과일과 채소가 여전히 많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농산물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계절의 변화가 달갑다. '이번엔 어떤 채소를 만날까?' 해가 바뀌면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얼굴을 찌푸릴 새가 없다. 새로운 제철 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앞서 가지 않고 설렘을 안고 기다리며, 이내 아쉬운 마음은 다음을 위해 간직한다. 때는 돌아오니까!
국내에서 재배되는 농산물을 기준으로 계절별 제철음식을 일부 소개한다. 토종 품종이 아닌 경우도 더러 있으니 참고하자.
[자연식물식 계절 밥상]
봄
채소 : 봄동, 유채, 취나물, 쑥, 달래, 냉이, 더덕, 두릅, 마늘
과일 : 딸기, 천혜향, 카라향, 진지향, 청견, 하귤
여름
채소 : 감자, 옥수수, 단호박, 오이, 고추, 열무, 상추, 깻잎, 가지, 양파, 애호박
과일 : 토마토, 참외, 수박, 복숭아, 자두, 살구, 포도, 매실, 복분자
(여름은 자연식물식을 하기 좋은 계절)
가을
채소 : 고구마, 밤, 무, 호박, 참나물, 토란
과일 : 사과, 배, 감, 석류
겨울
채소 : 무, 당근, 배추, 시금치, 세발나물
과일 : 귤, 유자, 한라봉(사과, 배, 감, 홍시 등 저장 과일)
보통은 한 가지 과일, 한두 가지 채소로 단출한 식탁을 꾸리고 있다. 봄에는 유채, 취나물, 여름에는 감자, 옥수수, 단호박, 가을에는 고구마, 사과, 배, 겨울에는 무, 배추, 시금치, 감을 즐겨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