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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30. 2023

화장대 없이 살기


작은 화장품 수납함을 사용했다. '미니 화장대' '화장품 정리함'이라는 명칭으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는 흰색 플라스틱의 수납함. 화장품에 먼지가 쌓이는 게 싫어서 몇 해 전 장만한 뚜껑 있는 화장대였다.


미니 화장대는 위에 손잡이가 달려 있어 가볍게 들고 옮길 수가 있었다. 앞뒤로 여닫을 수 있는 투명한 칸에는 기초화장품과 클렌징 용품을 세워서 보관하고, 아래에 있는 네 개의 작은 칸에는 립스틱, 아이브로우,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같은 색조 화장품과 면봉, 화장솜, 속눈썹, 렌즈 등 갖가지 미용 도구를 보관했다. 거울도 의자도 없지만 화장품이 많지 않은 내게 이 작은 화장대는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외출이 줄어들면서 화장을 할 일도 덩달아 줄어들었다. 한동안 토너와 수분크림만 들락날락하자 이 화장대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을 비우고 나니 화장품 살림도 간소하게 추려졌다. 기초화장품과 몇 가지 색조 화장품만 남기고 수납함을 모두 비웠다. 화장을 계속하더라도 이렇게 큰 수납함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꽉 들어찼던 화장대가 이제는 너무 커 보였다.


화장대가 없으니 토너와 수분크림, 바디로션을 방 한쪽에 있는 하얀 서랍 위에 올려 두고 사용했다. 새로운 화장대였다. 올려놓은 물건이 몇 개 되지 않으니 화장품에 쌓이는 먼지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용 후 가볍게 한 번씩 닦아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또 한차례 변화가 찾아왔다. 기초화장품도 쓰지 않게 되면서 이 간이 화장대도 말끔히 비워졌다. 지금 이곳엔 책이 올라가 있다. 내 방에서 화장대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예쁜 원목 화장대를 갖고 싶었던 적도 많았는데. 그 소망들은 다 어디로 흩어진 걸까? 신기한 일이다.


언젠가 다시 화장품을 쓴다 한들 화장대는 따로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욕실 선반, 주방 선반, 현관 선반, 서랍 위, 책상 위... 집 안 어디든 올려두고 쓰면 되니까. 갖가지 화장품에 대한 욕심도 예쁜 화장대에 대한 목마름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다시 화장을 할지도 몰라.' 내 마음을 나도 몰랐다. 티끌의 미련과 가능성으로 남겨 두었던 몇 가지 화장품과 먼지 쌓인 화장대를 정리하며 오랫동안 기약 없이 방치했던 유예 기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안녕,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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