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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Oct 05. 2023

트렌치코트 없이 살기


트렌치코트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트렌치코트를 비우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제법 오래된 일이다. 세탁을 해서 꺼내 놓으면 일 년에 며칠을 채 입지 못하고 다시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만 했다. 일 년에 단 며칠을 위해 존재하는 이 옷이 꼭 필요한 걸까? 이 의문이 생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트렌치코트는 봄이 아닌 가을에만 입었다. 따뜻한 봄 날씨에는 더워서 입지 못했다. 더위가 가시고 가을이 왔다고 해서 트렌치코트를 꺼내 입을 수는 없다. 가을 햇살이 강할 때에도 더워서 걸치기 힘든 옷이다. 쌀쌀한 날씨에 '이제 진짜 가을이다' 싶을 때, 코끝으로 바람이 제법 차다고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트렌치코트를 입을 수 있다. 겨울 문턱에 들어서기 전이 최적기다. 이렇게 날씨를 타는, 입기 까다로운 옷이 또 있을까.


트렌치코트를 입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부지런히 입지 않으면 며칠 입지 못하고 옷장에 넣게 된다는 말이다. 정말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아예 꺼내지도 못할지 모른다. 트렌치코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눈치 싸움에 공감하리라. 일 년에 이 옷을 입는 날은 길어 봤자 1~2주밖에 되질 않는다. 일주일만 입어도 많이 입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옷을 더 이상 두고만 있을 수는 없다. 드디어 정리할 때가 왔다. 더욱이 세탁과 관리가 까다로운 옷은 모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트렌치코트도 과감히 보내 주기로 했다. 막상 정리하고 나면 왜 진즉 비우지 않았냐며 기뻐할 터다.


겨울이 오기 전 쌀쌀한 가을바람에 맞서려면 가벼운 외투가 필요할 듯싶다. 사실 트렌치코트를 정리하려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예쁘기만 하고 불편하다는 것. 차림새가 좋아 보이는 것보다 몸이 편한 옷이 뭐니 뭐니 해도 제일이다. 애초에 예뻐서 산 옷, 더 이상 그 쓰임새가 없어졌으니 깔끔하게 정리하자.


이 트렌치코트는 가족이나 지인에게 주거나 중고거래 앱을 통해 이웃에게 나눔 할 생각이다. 새 옷과 다름없이 깨끗한 옷. 더 먼지가 쌓이기 전에 얼른 좋은 주인을 찾아줘야겠다.


어쩌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트렌치코트일지도 모르겠다. 트렌치코트에 대해 품고 있던 로망도 이제는 함께 떠나보낸다. 트렌치코트가 잘 어울리는 여성이 아닌 어떤 옷을 걸쳐도 당당한 나로 살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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