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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22. 2023

헤어드라이어 없이 살기


지난 일주일 여행에서의 일이다. 타 지역에서 일주일 살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머물렀던 숙소의 특이점은 헤어드라이어가 없었다는 것. 미리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헤어드라이어를 따로 챙겨 가지는 않았다. 짧은 머리도 아닌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였는데도 말이다. 내가 당시 꾸린 가방은 어깨에 메는 에코백이었으므로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다.


그렇다면 헤어드라이어 없이 어떻게 머리를 말렸을까? 바쁜 아침 지각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말리지 못했던 며칠을 제외하고 자연 바람으로 머리를 말린 것은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었다. 당시 계절은 봄. 그리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맑은 날씨. 비도 오지 않았으니 머리를 말리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한낮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오후에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는 건 집에서 가져온 샴푸를 똑같이 사용했다.


이제 머리를 말릴 차례. 수건으로 꼼꼼히 닦았다. 두피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수건 한 장으로 머리를 말린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떨어지는 물기가 없고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로 닦은 다음 머리를 가볍게 탈탈 털면서 몇 차례 바람이 통하게 해 줬다. 그리고 그냥 방치했다. 알아서 마르겠거니. 머리는 자기 전까지 충분히 다 말랐다.


헤어드라이어 없이 머리를 건조하면 단점이 하나 있다. 머리카락이 조금 떡진다는 것. 샴푸하고 드라이한 머리처럼 머릿결이 찰랑이지는 않는다. 분명 머리를 감았는데 상쾌한 기분은 아니다. 평소보다 조금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자연 건조할 때 중요한 건 짧은 머리든 긴 머리든 두피를 꼼꼼히 말려 주는 것이다. 자연 건조하면 뽀송함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대신 고요함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소음에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청소기도 쓰지 않는다. 그런 내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시끄러운 소음을 마주할 때가 머리를 말릴 때다. 그럼에도 시끄러운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긴 머리와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곱슬머리를 자연 바람에 말릴 경우 머리가 말 그대로 난리가 난다. 곱슬머리는 머리를 말릴 때부터 달래듯 차분하게 진정시켜줘야 한다.


내가 헤어드라이어 없이 생활하려면 고려해야 될 것은 곱슬머리와 추운 겨울이다. 곱슬머리의 부스스함만 감수한다면, 추운 겨울에도 끄떡없는 강철 체력을 기른다면 헤어드라이어 없이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려면 우선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게 도움이 되겠다. 아무튼 헤어드라이어가 없어도 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 큰 수확이었다.




지난 일주일의 여행은 뜻깊은 경험으로 남아 있다. 늘 사용하던 물건들이 없을 때 그럭저럭 괜찮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괜찮다'라는 건 그것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하루는 별 탈 없이 굴러간다는 소리다. 습관처럼 하던 일을 멈추었을 때, 생활에 큰 지장은 없다는 걸 발견했을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일상에서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쳐도 초연할 수 있는 태도, 열려 있는 마음도 함께. 그것이 물건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어느 날 헤어드라이어가 갑자기 고장이 나더라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여행에서도 헤어드라이어는 챙기지 않을 것 같다. 숙소에 구비되어 있다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을 테니까.





에코백 메고 떠난 일주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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