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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09. 2023

제모 없이 살기


올여름 남몰래 은밀한 실험을 했다. 그것은 바로 '제모 없이 살기'. 내 몸에 붙은 털들이 억지로 깎이거나 뜯겨 나가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든 털에게 생명을 다해 떨어지는 자유가 주어진 계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남다른 여름을 보냈다. 과연 나는 자유로웠을까?


오로지 '제모를 안 하고 살고 싶다'라는 욕구 하나만으로 감행한 일. 이전이라면 가볍게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실험 자체를 즐기게 된 나로선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 외딴곳에서 나 홀로 살아가는 인간도 아니면서 왜 이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왜 이런 기행을 저질렀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나란 인간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 문명인인가.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기라도 한 걸까. 호기심이 발동했다. 일단 재밌지 않은가?


이 글은 털과 자유에 대한 제법 진지한 성찰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웃음을 참을 필요는 없다. 털 얘기도 허심탄회하게,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겨드랑이 털과 이렇게 오래 함께한 건 처음이라는 고백을 먼저 밝힌다. 부끄럽다. 아니, 잠깐. 왜 겨드랑이 털은 부끄러워야 하나. 왜? 진지하게 생각을 먼저 해보자.


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과 속눈썹은 사랑해 마지않는다. 머리털이 빠질세라 한 올 한 올 애지중지하며 빠지는 털을 부여잡고 탈모에 좋다는 것은 다 하려 든다. 속눈썹에도 영양제를 정성스레 바르면서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은 차별한다. 언제부터 머리카락과 눈썹이 아닌 털은 보기 싫은 존재, 없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걸까? 왜 이런 차별이 존재할까?


우리는 왜 털을 가만두지 못하는가. 궁금하지 않은가? 예쁜 눈썹을 만들기 위해 눈썹 털을 밀거나 뽑아야 하고, 매끈한 다리를 위해 다리털을 밀어야 하고, 자신 있게 팔을 들어 올리기 위해 겨드랑이 털을 밀어야 한다. 심지어 이마와 목뒤를 매끄럽게 다듬는 헤어 라인 제모도 성행하고 브라질리언 왁싱도 흔해졌다. 이제는 성별을 가리지 않고 털 관리에 열심인 시대다. 우리는 머리에 난 털에는 그리도 관대하면서 머리카락이 아닌 체모는 못살게 군다. 제모의 역사와 문화를 파헤치기에 앞서 나는 왜 그것을 저항 없이 따르고 있으며, 나의 부끄러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질문할 필요가 있다.


지난 실험을 통해 살펴보자. 일찍이 한 여름에도 긴팔, 긴 바지를 입고 다니는 터라 문제가 없었다. 수영도 물놀이도 즐기지 않으니 밖에서 내 살갗을 내놓을 일이 없다. 아무도 내 털의 자유분방함을 모른다. 따라서 혼자만 아는 것이니 나만 괜찮으면 되는 일이다. 나만 부끄럽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이 머리카락처럼 예뻐 보이진 않아도 적어도 그것들을 제거하지 못해 참기 힘들지는 않았다. 제모로 인해 피부가 상할 일도 없으니 몸은 편안했다.


하지만 깔끔하지 않은 눈썹이야 괜찮다 한들, 제모를 하지 않고 민소매나 치마를 입을 자신이 없는 걸로 봐서는 나는 여전히 내 털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만약 겨드랑이 털과 다리털이 부끄러운 게 아닌 세상에서 자랐다면 나도 머리카락처럼 내 몸에 달린 다른 털들을 존중해 줄 수 있었을까? 나는 언제쯤 내 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언제쯤 내 몸의 모든 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까?




어려서부터 있었던 부끄러움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만무하다. 가끔은 원한다면 가벼운 정리를 하면서,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제모를 하지 않아도 민소매와 치마를 아무렇지 않게 입을 날이 올진 모르겠지만. 눈썹이 깔끔하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당당한 얼굴을 잃지 않고 싶다. 항상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언제쯤 내 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을까?' 이 말은 '나는 언제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게 될까?'라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은 서툴지만, 짧은 실험으로 조금은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듯하다.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리고 이 글을 남김으로써 작은 용기를 보태어 본다.


사실은 내 생각만큼 나는 그리 부끄럽지 않은 것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느껴야 할 수치심이란 내 생김새나 그것을 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부끄러운 언행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해서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자유에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나에게 관대해진다면, 이 모든 게 필요 없는 날이 올지도?





없이 살기 52. 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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