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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Sep 26. 2023

긴 머리 없이 살기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단발로 잘랐다. 문득 머리를 감는 물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자르겠다 결심하게 만든 특별한 이유도 있었다. 오랜 소원이었던 모발 기부를 하기로 한 것이다.


머리카락을 기부하고 싶다는 마음은 수년 전부터 움텄지만 오래도록 긴 머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토록 긴 머리를 사랑했다. 길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좋아했다. 화장은 포기해도 머리는 포기 못 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긴 머리를 고수해 왔던 내게 긴 머리란 마치 나의 정체성의 일부분 같기도 했다.


곱슬머리인 탓에 머리를 길게 기르는 편이 관리하기가 더 수월한 면도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머릿결을 관리하려면 수고롭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머리를 질끈 묶으면 그만이니까. 반면 묶지 못하는 짧은 머리는 매번 주기적으로 잘라줘야 하고 말릴 때마다 드라이를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긴 머리를 고수해 왔건만 막상 자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손으로 쓸어 주면 단발머리도 쉽게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시간까지 단축되니 왜 진즉 자르지 않았을까 싶다.


어깨에 닿지 않는 머리. 이렇게 짧은 머리는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지라 적응이 필요할 듯싶다. 숏컷을 한 적이 있지만 어떻게 길렀는지 기억이 흐릿하다. 단발머리를 한 내 모습이 좀처럼 상상되지 않았는데 제법 마음에 들어 요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본다.


단발머리로 처음 나선 저녁 산책길, 가벼워진 목선처럼 기분이 산뜻했다. 한발 한발 내딛는 발걸음마다 기쁨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이처럼 방방 뛰고 싶을 만큼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새로운 머리의 신선함과 짧아진 머리의 가벼움이 좋은 것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했다는 이유가 더 크지 않았을까. 다음날 자른 머리카락을 충만한 기쁨과 함께 상자에 담아 기부처에 전달했다.


도전과 시도는 늘 시작이 어렵다. 머리를 자르기 전 한참을 머뭇거리던 손도 머리 한 갈래를 자른 순간 거침없이 가위질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해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하고 나자 세상에 어려운 일은 없다는 걸 다시금 깨우쳤다. "그래, 머리카락은 또 자라니까." 붙들고 있던 미련이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머리를 짧게 자르기 전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 긴 머리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긴 머리를 포기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자신감도. 물론 다시 기부를 목적으로 머리를 기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당분간은 이 가벼움을 만끽하련다.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고데기도 이참에 정리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한결 가벼워진 어깨춤에 새 바람이 불어온 듯하다.





[모발 기부 방법]

- 머리카락 길이는 25cm 이상

- 펌, 염색한 머리도 가능

- 빠진 머리도 30가닥 이상 모으면 가능


자세한 방법은 기부처 홈페이지에서

어머나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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