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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Oct 26. 2023

책 없이 살기


책 없이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날이 오다니 신기한 일이다. 일 년에 책 한 권을 읽지 않던 과거의 나라면 분명 이렇게 답할 것이다. "무슨 소리야? 책이 왜 필요해? 당연히 YES지, 책 없이도 얼마나 재밌는 게 많은데!" 지금은 여행길에 옷은 무겁다고 포기해도 책은 무거워도 포기하지 못하는 걸 보면 상황이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책을 읽기 시작하며 삶의 태도와 방향성이 명확해졌다. 책은 나와 가장 많이 소통하는 대상인 동시에 나 자신과의 대화가 이어지도록 하는 흐르는 물이다. 그 흐름 속에서 안정감을 찾았다. 책이란 자기 계발을 넘어 자기 혁신으로 나를 성장케 하는 가장 가까운 도구였다. 타인의 생각과 삶에 책만큼 쉽게 접속할 수 있는 통로가 있을까. 독서란 시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의 경험이다. 책은 때로는 좋은 자극제가 되어 일상을 지탱해 주었고 때로는 오갈 데 없는 마음을 품어주는 바다 같았다.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느덧 책은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런 지금 책 없이 산다고 생각하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다. 무료하고 공허할 것만 같다. 물론 다독을 하지도 않는 데다 독서하곤 거리가 멀었던 오랜 경력을 자랑하니 일주일 정도는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무료하고 글에 대한 갈증을 느끼겠지만 한 달까지도 그럭저럭 지낼 것 같다. 책 대신 무언가를 찾아 나설 테니 말이다. 한 달 정도 책 없는 일상을 지내보고 싶다. 무릇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얻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스님이 산속 토굴에서 지내며 수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추운 겨울 밥을 지어먹고 누울 수 있는 작은 토굴 안에서 스님은 책 한 권도 없이 홀로 수행에 전념한다. 책도 속세에 대한 미련이자 집착이기에 토굴 수행을 할 때는 모든 책을 놓고 들어간다고 했다. 그 이야기가 이따금 떠오를 때면, 책도 결국에는 즐거움에 대한 욕구이자 지식과 지혜에 대한 갈망이자 타인의 삶을 엿보고자 하는 탐심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미친다.


명상 센터에 들어가서 일주일 정도 지내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밥을 먹고 명상을 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얘길 들었다. 비워내고 내려놓아야 하는 시간 속에서는 책도 끊임없이 잡념을 일으키는 방해꾼으로 취급받는다. 종교적인 수행이든 개인적인 의미의 마음 수행이든 비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에게는 책도 그저 하나의 잡념 덩어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책을 읽지 않고도 지혜로운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말이 와닿곤 한다.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 느낄 때가 많다. 삶 그 자체로 배움과 성장이 되어 자라왔던 시대는 과거가 되었고, 우리는 그 기회를 잃어버린 시대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한 편으로 응축된 삶의 지혜에 갈증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는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닌 내 몸으로 터득하는 삶의 지혜가 아닌가 하는 상념에 잠길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책도 우리에게서 순간의 삶을 빼앗아가는 존재가 된다. 책에 빠져 있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의 공기를 마시는 것, 일상에 흘러가는 작은 조각들을 보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오붓한 시간, 바로 지금을 담는 시선과 순간을 느끼는 감각을 놓친 채 문자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


든든한 버팀목이자 세상과 통하는 창구가 되어준 책에게는 감사하지만, 언젠가는 책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눈을 뜨고 감는 순간들이 삶의 모든 것인 삶, 계절에 따라 생명이 움트고 지는 자연과 소통하는 감각으로 배우는 삶, 문자가 아닌 생명에서 삶의 양식을 일구는 삶,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누리는 삶을 그려 본다.


활자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스크린과 스마트폰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에 눈을 떼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있는 삶이란 글에서 내 삶에 대한 이정표와 확신을 애써 더듬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그것으로 온전한 삶일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 손에서 글을 내려놓고 책장을 덮는 과감함을 가져봐야겠다. 그 내려놓음이 지금 이 순간의 자유와 삶을 가져다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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