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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Nov 16. 2023

욕 없이 살기

마음 미니멀리즘


욕을 싫어한다. 듣는 것도 하는 것도 싫다. 그래서 욕을 하지 않는다. 욕설이 난무한 영화나 드라마도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욕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역사가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욕을 처음 했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나는 욕은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 대로 성실히 지키는 모범적인 어린이였다. 그 무렵 학교 친구들은 어디선가 배워온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ㅇㅇ이가 욕한 걸 본 적이 없어."

"ㅇㅇ이는 욕 할 줄 모르잖아."

"ㅇㅇ이는 착해서 못해."


한 번씩은 욕을 해본 아이들. 그 속에서 나쁜 말은 할 줄도 모르는 아이. 마치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 왠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얕잡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순간 그동안 익히 들어왔던 욕을 뱉어버렸다.


"XX"

"와~"

"뭐야! ㅇㅇ이도 욕할 줄 알아?"


(무슨 욕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온 친구들의 환호 때문인지 금기시된 벽을 깨부순 탓인지 어린아이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속으로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내 생에 첫 일탈이었다. '나도 할 줄 알아.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 무시하지 마.' 감춘 속마음이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이후 특별히 달라지지 않았지만, 친구들에게 내가 마냥 착하고 조용한 아이만은 아니라는 걸 각인시킨 일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욕을 한 건 조금 더 머리가 자란 뒤였다. 중고등학교에 들어서며 여느 친구들처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청소년이 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무시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상대를 향한 비난과 험담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욕이 일상어가 되어 비속어를 쓰지 않고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으로 고착화되고 만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했던 욕은 성인이 되는 동시에 낯 뜨거워졌다. 비속어를 쓰는 게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욕을 하는 사람이 강해 보이는 게 아니라 멸시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자연스레 욕을 끊었다. 욕이 나쁘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고 다 큰 성인도 안다. 문제는 알면서도 한다는 것이다. 입버릇처럼. 욕의 본뜻을 몰라서 하기도 하고, 악의가 담겨 있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가볍게 여기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고 입이 거친 사람이 된다.




지금은 욕은 생각으로도 속으로도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욕을 하지 않다가도 이따금 속으로 욕이 나올 때도 있었다. 정말 화가 났을 때 혼자 입 밖으로 나직이 꺼낸 적도 있다. 참기 힘든 감정이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때다. 나도 사람이다. 그래도 자제하려고 한다. 욕이 감정을 해소시켜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욕을 하면 나만 손해다. 내 입으로 하는 욕은 가장 먼저 내가 듣는다. 아무리 대상 없는 분풀이일지라도 결과적으로 나를 향한 욕이 된다. 욕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요즘은 감정에 쉽게 휘말리지 않고 내가 욕을 뱉어야만 되는 일을 만들지 않는 편이다. 즉, 화가 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최대한 내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욕설이 좋은 배출구가 될 수 없음을 알기에.


욕을 한다고 꼭 나쁜 사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행동으로 사람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말이 그 사람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말로써 그 사람이 사려 깊게 말을 하는 사람인지 되는 대로 말을 뱉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말이란 그릇은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비속어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욕은 사람을 한 순간에 달라 보이게 만든다. 좋은 감정을 주고받던 상대와 영화를 보러 간 날이었다. 그날 본 영화는 약속 시간에 맞춘 영화였다. 영화 취향을 양보한 대가를 치렀다. 줄곧 욕설이 쏟아져서 도통 스토리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유쾌하기보다 불쾌했다. 기가 막힌 건 남자 주인공이 욕을 하면서 여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내게는 전혀 공감할 수 없었던 대사가 함께 본 사람에게는 명대사였나 보다. 영화를 보고 헤어진 뒤 그 사람은 카톡 프로필을 그 대사로 장식했다. 내내 점잖은 모습에 호감이 갔던 터라 그 모습을 보고 감정이 차게 식고 말았다. "XX. 사랑한다." 영화 속 주인공의 데일 듯한 사랑고백은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최근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큰소리를 들었다. 욕설은 섞이지 않았으나 남을 탓하고 질책하는 비난과 화가 잔뜩 실린 어조였다. 지나가는 사람이 모두 쳐다볼 만큼 언성이 높았다. 전후사정도 모르고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 들었지만, 내가 그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당사자도 아니지만, 그저 스쳐가듯 몇 초 사이에 들은 말인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나빠졌다. 공격적인 말, 부정적인 말은 듣는 것만으로 해가 된다는 걸 피부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내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이란 돌고 도는 법이다. 때로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저의를 파악하기 힘든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지난날 뱉었던 말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내가 했던 말이 돌고 돌아 나에게 온 것은 아닌지. 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이다. 말로 상처를 받더라도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지는 말자.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 다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자. 감정이 앞서지 말고 생각하고 말하자. 오는 말은 막지 못해도 가는 말은 고를 수 있으니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 좋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이 좋다. 예쁘고 다정한 말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이면 좋겠다. 유순한 사람이 험한 말을 입에 담지 않게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서로 배려하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세상이 어떻게 꽃밭이겠냐마는, 어떻게 살면서 좋은 일만 생기겠냐마는. 그래도 말 한마디로 빚을 지기보다 말 한마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우리가 말로 서로를 죽이지 말고 서로를 살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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