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성 우울증
나는 겨울이 되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진다. 좋아하던 일도 하기 싫어진다. 낮잠도 안 자던 사람이 잠이 많아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벌떡 일어나던 몸도 좀처럼 일으키기가 힘들다. 만사가 귀찮다. 특별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식욕이 늘어 과식을 하고 살이 찐다. 평소에 못 느끼던 외로움도 느낀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주요 증상들이다.
나는 이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도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덩달아 흐려지곤 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겨울이 되면 유독 게을러진다. 마음의 평정이 깨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쉽게 휩싸인다. 평소에 쉽게 하던 일도 어려워진다. 겨울마다 늘어지는 건 결국 내가 게을러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나와 비슷한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증상은 '계절성 우울증(seasonal affective disorder)'이다. 'SAD' 또는 '계절성정동장애'라고도 한다. 겨울에 무기력감과 우울감을 느끼는 건 일조량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생물학적 반응이다. 반대로 따뜻한 봄이나 여름에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도 있다. 계절성 우울증은 겨울이 긴 나라에서는 흔히 겪는 증상이라고 한다. 북반구 사람들은 겨울 채비를 하며 마음의 준비도 함께 한다고 한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신체와 감정의 변화를 겪는 건 유별난 일이 아니다.
2023년의 마지막 주말, 나는 잠만 잤다. 1년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도 자도 졸린 몸이 이상하여 우울감이 예사롭지 않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검색창에 '겨울 우울증'이라고 검색하며 최근 겪은 변화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한동안 모든 글을 쓰기 싫어질 만큼 무기력감에 사로잡혔다. 글감은 차고 넘치고 다음 기획들도 잔뜩 쌓여 있다. 한 시리즈는 10편만 쓰면 끝인데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평소처럼만 하면 거뜬히 해낼 일도 버겁다. 루틴도 망가졌다. '너 대체 왜 그러냐'고 따져 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다른 종류의 글도 열심히 써보면서 좋아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봐도 마음이 잡히지가 않아서 고민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이유가 있었다니... 내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일시적인 증상이라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중요한 판단은 잠시 보류하기로 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겨울에 나태해지고 충동적이고 판단력이 흐려지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기가 가장 첫 번째로 할 일이다.
돌이켜 보면 나의 겨울은 늘 그랬다. 학생 때는 겨울방학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을 그만둔 시기도 대부분 겨울이었다. 저마다 계기가 있었지만 나는 책임감이 없는 나를 자책하기 바빴다. 힘들어도 버티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비교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순간의 충동이 진실한 마음이라 믿으며 순간의 결정에 따르기만 했다. 내가 겨울옷이 적은 이유도 여기 있다. 무기력감에 밖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코트 한 벌만 있어도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겨울을 겪고도 이 계절은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나 보다. 겨울이 되면 마음도 꼼짝없이 얼어붙어서 모든 활동에 제약이 걸린다. 핑계라고 하기엔 겨울의 나는 평소의 나와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 차디찬 계절은 내게 무시 못 할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평온한 감정 상태를 유지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에너지를 쏟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이란 가령 날씨와 호르몬이다. 나는 생리 전 증후군을 겪는다. 안 먹던 음식이 먹고 싶어지거나 과식을 하거나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지고 짜증이나 화가 난다. 생리가 시작되기 전 날 나타나는 증상이다. 호르몬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신체 반응이지만 손 놓고 있지만은 않는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극복하려 하지 않고 대처하기'다.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애써 회피하려 하거나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나의 상태를 인지하고 일시적인 감정들이 지나갈 수 있게 그저 통로를 열어 두기만 한다. 일시적인 변화는 나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 관대해져야 하는 때다. 조금은 느리게 가야 하는 시간,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한 시간들이 있다. 내가 생리 전 증후군을 겪는 건 한 달에 한 번, 계절성 우울증이 극심해지는 시기는 12월, 약 한 달이다. 내게는 한 달에 하루, 그리고 일 년에 한 달이라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제는 회피가 아닌 수용을 할 차례다.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겨울을 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려고 한다.
계절성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비타민을 챙겨 먹거나 약을 복용하는 등 외부적인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확실히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적인 반응에는 자연적인 방법이 보다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나는 햇볕을 좀 더 쬐고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고 생활공간을 따뜻하게 하고 최대한 스트레스받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는 실제로 계절성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에게 일차적으로 권고되는 방법이다.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햇볕을 충분히 받는 것이다. 다시 낮 산책을 꾸준히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해바라기여서 그런 모양이니 햇볕 아래서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야겠다.
갈수록 계절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사계절 대비가 뚜렷한 한국이다.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항력은 아니다. 계절의 흐름은 통제 밖의 영역이지만,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이 시기 또한 지나간다고 생각하며 봄을 기다린다. 나는 다시 활기찬 나로 돌아올 거라 믿는다. 겨울에 맞서려고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잠시 쉬어가라는 뜻에서 자연이 주는 시간을 감사히 받아들이자. 그래도 땅굴을 깊게 파고 들어가지 않도록 내게 햇살을 더 비춰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고 좋아하는 것들을 보여 주자. 그렇게 나를 좀 더 살뜰히 보살피다 보면 날이 풀리듯 언 마음도 녹을 것이다. 그때 다시 정진하면 된다.
겨울마다 찾아오는 이 시간을 불청객이 아니라 손님이라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어떤 겨울은 유독 힘들고 어떤 겨울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쏜살같이 흘러갈 수도 있다. 매번 찾아오는 겨울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어느 때보다 반갑게 기다려질 수도 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듯 겨울이 온다. 겨울이면 조금은 달라지는 나와 계속해서 함께하다 보면, 언젠가 이런 나도 포용할 여유로움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추워지기 전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든든히 하고, 겨울이 오면 단골손님이 왔구나 인사하면서 잘 대접하기로 하자.
계절성 우울증을 오래 겪으면서도 겨울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놀랍다. 겨울 특유의 춥지만 따뜻한 정서 때문일 것이다. 겨울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노래와 옷과 분위기로 가득한 계절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그 계절들을 지나왔나 보다. 이 겨울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춥지만 따뜻한 겨울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