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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결 May 17. 2023

염색 없이 살기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꽤 오랫동안 자연 모로 지내다가 늦바람이 들어 염색을 시작했다. 애쉬브라운, 밀크브라운, 카키브라운, 오렌지브라운, 다크브라운… 새카만 흑발까지. 탈색은 안 해봤지만 제법 여러 가지 색을 해봤다. 2년 동안 염색을 꾸준히 했고 즐겼다. 염색은 해볼 만큼 해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미련은 없다.


하지만 새치가 난 건 어떡하지? 극심한 스트레스로 갑자기 머리를 뒤덮은 새치. 건강을 회복하면 자연스레 없어질 줄 알았다. 만약 그러지 않고 새치가 계속 자라고 그게 더 큰 스트레스가 된다면 언제든 다시 염색을 할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 염색은 한 번 하기 시작하면 계속하게 된다. 밝은색의 경우 뿌리는 한 달만 지나도 티가 나서 매달 뿌리 염색을 해야 한다. 금세 자라난 뿌리의 검은 머리는 보기 싫은 게 되어 버린다. 얼른 다른 색으로 덮어 버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본연의 색은 잃어버리고 거짓된 색만 남는 주객전도. 새치 염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새치가 났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려면 빠르게 감춰야 할 테니까.


염색약은 인공 화학 물질 덩어리다. 매달 뿌리 염색을 하게 되면 두피에 그만큼 자극이 간다. 염색을 하기 전날 피곤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잤을 때는 두피가 찌르듯이 아팠다. 마치 “나 좀 살려줘” 하고 외치듯이. 염색약을 바를 때는 독해서 눈에 안 좋다는 얘길 듣고 눈을 최대한 감고 있었다. 마치 몸에 나쁜 짓을 하는 나를 눈 감아 버리듯이.


염색은 건강을 생각한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 중 하나. 내게도 염색이란 오로지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에 불과했다. 이제는 어느 것보다 건강을 생활의 최우선으로 두게 되면서 건강에 해로운 일은 멀리하기로 했다. 건강을 잃고 보니 그것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새치가 있어도 더 이상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건강 때문이다.


게다가 주기적인 염색은 부담스러운 고정 비용이 든다. 전체 염색의 경우 긴 머리는 기본으로 1회에 10만 원이 넘고 좀 더 좋은 염색약과 트리트먼트까지 추가하면 20만 원. 그리고 상한 머릿결을 관리하기 위해 미용실에서 추가적인 시술을 받거나 집에서 각종 헤어 에센스, 헤어팩, 트리트먼트, 린스를 사용하게 된다. 심지어 새로운 색으로 바꾸면 눈썹도 색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아이브로우 펜슬까지 새로 사야 한다. 지불해야 하는 건 비싼 비용만이 아니다. 샵에서 앉아 있는 시간은 기본이 1시간 길게는 2시간이다. 시간까지 지불해야 한다. 참 소모적인 일이다.




새치가 났으면 어떤가. 그냥 남들보다 일찍 성숙해졌다고 착각하고 살기로 했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날 텐데 그냥 조금 일찍 생긴 것뿐. 너무 빨라서 억울하긴 하지만. 차라리 먼저 경험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히려 주름이 생기고 거울을 보기만 해도 내 나이를 실감하게 되는, 지긋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흰머리가 그 나이를 더 보태는 미운털이 될 것만 같으니까. 일종의 면역을 갖게 된 게 아닐까.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너무 이른 나이에 생긴 흰머리는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새치가 자란 건 내 몸에 어떤 반응으로,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난 일. 그러니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추고 덮으려 할수록 그 스트레스는 더욱 커지고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되어 버린다. 그거야말로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이상 새치를 뽑지도 않고 염색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받아들임'도 연습하면 된다는 걸 배웠다.


흰머리가 났다고 내 색이 바랜 것도 아니고 내 색깔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다. 나이 들어 보인다고 더 나이가 드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내가 얼마큼 내려놓게 됐는지를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또한. 한껏 꾸미는 걸 좋아하던 내가 이렇게 무던해진 게 참 신기하다.



어쩌면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게 아닐까?



아, 연애를 한다면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람은 너무도 쉽게 태도를 달리하니까. 하지만 이 새치 머리를 방치하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더 끌리지 않을까. 아니면 말고. 나를 굳이 바꿔가며 사랑을 하고 싶진 않다. 나는 이미 충분히 나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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