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결 Jul 30. 2023

화장 없이 살기


올해 들어 한 번도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화장품을 구입하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화장을 하지 않으니 외출이 편해졌다. 항상 외출 준비를 하려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지금은 화장을 하느라 아침을 부산하게 보내지 않는다. 아침잠과 아침밥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씻고 옷만 입으면 외출 준비가 끝난다.


가방도 가벼워졌다. 수정 화장을 위해 화장품 파우치를 번거롭게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수정 화장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먹을 때면 입술을 수시로 체크해야 하고, 면봉을 챙겨 다니면서 눈가에 번진 화장을 수시로 닦아내야만 했다. 이제는 화장이 지워질 새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가장 좋은 건 외출 후 집에 돌아와서의 일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화장을 지우는 게 귀찮아서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는 게 일상이었다. 더는 눈 따로 입 따로 피부 따로 지우는 일도, 클렌징 워터와 폼 클렌저로 2차 세안을 할 일도 없다. 기초화장품도 선크림도 바르지 않다 보니 하루 두 번 물세안을 하는 게 전부다. 더운 여름철에는 언제든 세수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화장을 멈추자 피부도 안정을 되찾았다. 식습관의 영향도 있지만 우선적으로 피부에 가하는 직접적인 자극이 줄어들어 예민했던 피부가 많이 진정되었다. 화장을 하고 지우면서 화장솜으로 여러 번 얼굴을 닦아내느라 매번 자극이 갔었다. 이전과 비교하자면 최상의 컨디션이라고 느꼈던 피부 상태를 평소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엔 피부 트러블을 달고 살았는데 요즘은 웬만해선 얼굴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다. 유해 성분을 배제한 화장품만 골라 쓴다고 한들 화장품에 들어 있는 모든 화학 성분들이 안전하다고 할 수 없다. 피부는 배출 기관이다. 화장품은 노폐물의 배출을 방해한다.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의 수와 양만큼 몸에 독소가 쌓인다. 그런 걱정으로부터 벗어났다.


화장을 하지 않으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절약된다. 그동안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화장품에 투자하고 있었다. 화장은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지워진다. 지속력이 뛰어난 제품으로 정성스레 화장을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제거해야 하는 불순물이라고 생각하니, 화장을 하는 시간과 화장을 지우고 지친 피부를 관리하는 모든 시간과 비용이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화장을 하고 지우고 피부를 관리하고 메이크업 영상을 찾아보는 대신 여유로운 식사를 하고 책을 보고 글을 쓰며 휴식을 취한다. 같은 24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내 시간이 더 늘어난 것 같다.




10대부터 화장을 했다. 일찍이 입문을 한 탓에 졸업 또한 빨리 찾아온 걸까. 반평생 화장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자 주된 관심사였으며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귀찮거나 시간이 부족해서 단계를 줄이는 경우는 있어도 화장을 안 한다는 선택지를 고려해 본 적은 없었다. 화장을 하면 더 예뻐질 수 있는데 화장을 안 한다는 건 어딘가 손해 보는 일 같았다. 화장한 내 모습에 만족하며 화장을 포기하지 못했다.


화장을 지우는 일은 싫어했어도 화장하는 건 좋아했다. 주로 간단한 메이크업을 했지만 특별한 날에는 1시간 가까이 공들여 꾸미곤 했다. 오랜 시간 연한 화장만 고수하다가 다양한 색조 메이크업을 하는 재미에 푹 빠지기도 했다.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을 때도 화장이 들뜨고 뭉치고 콧등의 파운데이션이 벗겨져도 풀 메이크업을 하고 다녔을 만큼. 유튜브로 즐겨 보는 영상도 뷰티 크리에이터들의 메이크업 영상이나 화장품 관련 리뷰가 대부분이었다.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을 때는 집 앞에 잠깐 갈 때도 화장을 하곤 했다. 내면을 가꾸는 일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외모를 꾸미는 데에 열중했다. 그 시기에만 할 수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지난날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내면과 건강을 돌보는 일에 소홀했던 건 아쉽다. 반대로 어릴 때부터 한껏 멋을 부린 덕에 지금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로 머리를 질끈 묶고 밖을 나서도 부끄럽지 않은 걸 보면 자신감이라는 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이 분명하다. 여전히 나 자신에 대해 갈팡질팡하는 순간들이 찾아오지만, 달라진 건 내 안의 나를 느끼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이 자유로운 일상을 오래 지속하고 싶다. 평생 화장을 안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게 사람 마음이니. 우리는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에,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인생이 재밌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사람의 매력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모습을 결정짓는 선택도 타인의 시선과 강요가 아닌 나의 선택이리라는 것이다. 화장을 하느냐 마느냐보다 중요한 건 화장을 했다고 나를 더 사랑하거나 화장을 하지 않았다고 나를 더 사랑하지 않는, 나를 향한 편협한 시선을 거두는 일 아닐까.


화장을 한 얼굴이 훨씬 예뻐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데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예쁠 수 있다. 아니,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 나이가 들며 외모도 조금씩 바뀌는데 주름과 잡티가 늘어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인생이 피곤하지 않겠는가. 예쁘지 않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외모가 조금 달라졌다고 해서 내가 아닌 것도 아니다.


나무는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한자리에서 평생을 사는 나무는 알고 보면 누구보다 변화무쌍한 존재이며 매 순간 삶에 최선을 다한다. 험난한 지형과 악조건에서 자란 탓에 몸통과 가지가 꺾여 있는 나무도 여전히 나무인 것처럼, 나도 나일뿐이다. 어떤 변화 속에서도 내가 나를 받아들이면서 매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가면 된다. 살다 보면 그늘에서 햇빛을 받기 위해 하늘을 향해 한껏 몸을 비튼 나무가 실로 아름다워 보이듯 나의 못난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없이 살기 41. 화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