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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의 이야기/누군가의 여행

이 길을 여로라 하고 싶다

by 하루하늘HaruHaneul

'외국에 여행 온 것 같구나'


천국에 다녀오셨다던 아버지는 재활병원을 나서던 그날부터 매일 여행하는 기분이라고 하신다. 시간이 없다고 갈 곳이 많다고 낯선 어디든 반가워라 하신다. 평생을 지내 온 서울을 외국에 온 것 같다고 하시며 즐거워라 하신다. 골목골목 안 가본 길이 없는 아버지의 종로와 광화문은 낯설고 새로운 공기를 품은 외국이 되었다.


머리에 선명하게 남은 수술자국이 없다면 그날 그 일이 일어났을까 의심스러워진다. 두개골을 이리저리 가르며 깨어진 조각을 의료용 본드로 붙이고 스테이플러로 봉합을 한지 몇 달 만이다. 기억나지 않으신다니 영문도 모른 채로 응급실과 수술실 그리고 영안실과 중환자실 사이에서 정문을 걸어서 퇴원하는 기적까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짧게 자라난 흰머리 사이로 핑크색 흔적을 앞뒤로 옆으로 남겼다.


수술 후 의사의 당당하고 개운한 얼굴이 결과를 알려주는 듯했지만 그 기색을 알아차릴 정신은 없었다. 그가 알려줄 수 있는 가장 극악한 경우의 수는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이었고 두려움에 머리가 암전 되는 기분이었다. 장녀의 존재는 참으로 다용도다. 기대주이며 기쁨의 근원이고 어려울 때 나타나는 강한 철인이고 중심이다. 터질듯한 울음도 부서질듯한 흔들림과 불안도 이 상황에선 깊숙이 가라앉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집도의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한다. 왼쪽 두뇌의 손상과 남은 뇌를 쓰면 된다는 덤덤한 표현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무감각하게 뱉는다.


절망적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 더구나 아버지의 인격이 변한다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보행이 어려울 수 있고 언어기능을 상실할 수 있고, 성격이 난폭해질 수 있으며....'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기에 믿지 않았다. 그러던 아버지를 중환자실에서 처음 만나던 그 순간, 내 손을 잡는 모습에 확신을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12시 중환자실 문이 굳게 닫히고 다름 날 저녁 8시에 20분간 면회라더니 그 시간이 되기도 전에 아버지는 병실로 옮겨졌고 새벽에 집에 들어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시 한 시간 반 거리의 병원으로 갔다. 키가 큰 아버지를 잘 움직일 수 있게 24시간 남자 간병인을 구하고 무표정의 그 남자에게 아버지를 맡겨 놓은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났고 진행됐다. 노련한 간병인은 보호자를 달래고 면회도 되지 않는 병원에 죽을 끓여 들고 나르며 아버지를 다시 보기를 기도했다. 하루 한 번 아버지대신 간병인과의 비밀 만남이 무르익어 갈 무렵 아버지가 재활실로 가신다는 이야기에 환자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시간 전부터 기다리다 만난 아버지. 이동하는 휠체어에 매달려 눈을 마주쳐보지만 앉아있을 기력도 이곳이 어딘지 왜 와있는지도 모른다. 야속하다.


그렇게 재활실로 사라지는 휠체어의 뒷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기를 몇 회. 아버지는 재활을 고통스러워했고 그만두고 싶어 했다. 고통 앞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는 모습에 절규라도 하고 싶었다. 죽을 싸들고 드나들며 기다리던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 복도.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공간. 그 공간을 벗어나 아버지는 광화문인근을 산책 중이다.


외국 같구나... 종로가 본적인 아버지의 광화문이 주는 낯섦은 다시 얻은 삶에 대한 남다른 표현이다. 이제 다시 비행기를 탈 일도 더 이상 장거리 여행도 힘든 상황에 익숙한 그 동네를 걸어서 다시 기억을 되돌리고 희미해진 것들을 선명하게 하는 이 시간. 청력이 손상된 아버지의 입술에선 '아~ 외국 같구나~'가 연신 반복된다. 외국이 어떻더라?


문득 생각해 보니 낯설고 자유롭고 좋은 것만 눈에 들어오는 곳. 그랬다. 어디든 깊이 간여하지 않고 낯설면 그때부턴 외국이 된다. 관조의 장점이다. 삶의 어느 한순간을 훌쩍 뛰어넘어 순간이동을 하듯 햇살과 공기를 느끼는 순간, 삶은 여행이 되고 가는 길은 여정이 된다. 아버지의 생이 낯설어지고 다시 익숙해지는 이 시간. 나이들어 가는 나의 길도 새로운 모퉁이를 돌아선다. 그 길이 낯설고 아름다운 여정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https://youtu.be/trVCbDpmIH0?si=JAOeztG94v5pw6hU




사정이 생겨 16회를 마지막으로 2025 수요일의 이야기는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그동안 독자가 되어주신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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