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깡다구가 문제다

십 년 넘게 해온 일을 그만둔 이유

by 묘보살과 민바람

나에게는 ‘깡다구’가 있다. 고등학생 때 전단지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장님에게 그런 말을 들었고, 대학생 때 신입들이 지루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잠적하던 패러글라이딩 동아리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다. 나는 그런 평가가 만족스러웠다. 사회적으로 내세울 만한 가장 확실한 장점 같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 그놈의 깡다구가 문제다. 여력도 없으면서 버티면 어떻게든 나아질 거라는 생각. 아니 생각도 없이 질주하는 습관. 뭐든 붙잡고 하고 있지 않으면 곧장 찾아오는 불안과 조급증 때문이다. 불안과 조급함은 판단력과 반비례하는 듯하다. 나는 옳게, 요령 있게 하려는 궁리 없이 그저 ‘최선을 다해 하고 있다’는 데에서 만족을 찾는다.(패러글라이딩 선배들은 캐노피를 기울여 바람을 넣을 생각도 안하고 용을 써서 미친 듯 앞으로 달려가는 나에게 ‘야생마’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래서 일하는 방식도 비효율의 극치인데, 지금까지 인생의 방향성에서도 그랬다. 체력, 정신력, 시간 같은 내 삶의 밑천을 아낌없이 써버린 것이다. 내가 진짜로 이루고 싶은 일을 할 때 써야 할 것을 남겨 둬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 했다.




첫 글을 읽으신 분이라면 ‘읭?’하실 텐데, 나는 말하는 일을 13년간 직업으로 삼고 지냈다.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꿈꿨던 내가 그렇게 긴 시간 말하는 직업을 유지했다는 것은 스스로도 여전히 놀랍다. 조금 긴 얘기가 되겠다. 스물두 살에 한국어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을 때, 시를 써서 당장 먹고 살 수 없을 거라는 세속적인 고민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했다. 글은 쓰고 싶고, 무작정 부모님 신세를 질 수는 없고, 회사생활은 자신도 관심도 없는데, 이제 뭐 해 먹고 사나, 내가 뭘 할 수 있지. 대학 3학년답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중 불현 듯 떠오른 것이 있었다. 취업한 선배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특강 형식의 프로그램에서 나누어준 자료였다. 책장을 뒤져 찾아낸 한 장의 A4용지에는 외국인을 가르치는 한국어교사가 되면 어떤 점이 좋은지, 어떻게 하면 자격을 얻고 일을 할 수 있는지 간단히 설명되어 있었다.


오오오, 그래, 이거다. 완벽하다. 동아줄이 내려온 듯했다. 마침 떠나서 살고 싶은 갈증에 목이 타고 있을 때였다. 언어를 쓰는 일을 하고 싶었고, 서툰 의사소통 방식 탓인지 한국 사람보다 외국 사람을 만나는 게 편했고, 여러 나라의 문화가 궁금했고, 우리 집과 한국의 답답한 분위기가 숨막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외국에서 유유자적 시를 쓰며 사는 모습은 로망 그 자체였다. 또… 또… 나는 자료도 꼼꼼하게 잘 만들고 뭔가 창의적으로 구성하는 일을 좋아하니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한국어교사 일이 순식간에 천직으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하며 그들의 기대에 맞추는 일이라는 점이 내심 걸렸지만, 그래서 더더욱 천직이라고, 오히려 나의 사회성을 유지해주고 땅속으로 삽질해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당시 ‘해야 하는 말’을 잘하며 지낸 덕에 학과와 동아리에서는 나름대로 핵심멤버가 되어 있었다. 타고난 아싸의 기질을 다양한 경험에 대한 욕심으로 덮어 인싸로 정착하는 엄청난 성과를 낸 나였기에, 노력하면 하는 대로 천성도 보완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스터디그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고, 연구머리가 없었지만 이를 악물고 석사 논문도 써냈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기대에 눈이 빛나던 서른 명의 유학생을 마주한 첫 수업. 터질 듯한 긴장감과 함께 그보다 큰 설렘과 자부심으로 가슴이 요동쳤다. 서로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늘 불확실했지만, 그래서 더욱 교감은 신선했고 시시한 농담의 재미도 배가 되는 것이었다. 이해를 도우려는 내 과장된 몸짓과 표정 한 번에, 농담 한 마디에 교실 전체에 웃음이 확 터지는 순간이 좋았다. 시간이 반짝거리며 흘렀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한 학기 내내 수업을 준비하고 강의하는 나는 치열했고 빛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나서야 유유히 수면에 떠 있기 위해 미친 듯이 휘젓는 백조의 발이 보이나 보다. 연기와 농담을 하며 너스레를 떨고, 신선한 활동을 제안하고. 나는 발랄한 수업을 했으나 내 마음은 발랄하지 않았다. 늘 비슷한 컨디션으로 밝은 얼굴, 또렷한 판단력과 순발력, 언어구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가라앉는 기분을 보통 수준으로 띄우는 것만도 버거웠고(이것이 기분부전장애라는 것은 이십 년 가까이 자학을 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기초체력이 약해 컨디션이 나빠질수록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도 문화적 배경도, 한국어 수준도 제각각인 수십 명의 ―한 학기로 치면 백 명에 가깝기도 한―학생들. 나는 그들이 가진 섬세한 마음과 고충을 대충 넘겨가며 수업시간을 채우는 데에 만족할 만큼 마음이 무디지도 못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꼽아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자는 건지.’ 내 본모습과 다른 결의 일을 하면서도 내 그릇의 두세 배는 더 담아내려 했으니 말이다. 나는 일 중심의 생활을 하면서 체력을 빠르게 소진해 갔다.


당연히 일을 하며 내 글을 쓰기는커녕,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마저 달렸다. 괜찮은 교사이고 싶은 욕심과,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의 몇 배나 노력해야 하는 나의 본모습이 매순간 부딪혔다. 자책으로 온종일 머릿속이 복잡했다. 머리와 마음은 혹사하는데 체력은 고갈 상태. 언젠가부터 나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지하는 데만도 애를 쓰고 있었다. 교사가 성인군자일 필요도 없고 모든 수업이 최고일 수도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선생님은 최소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좋은 에너지를 주지는 못할망정 내가 숨긴 어둠만을 들킨다고 느낄 때마다 한없이 숨고 싶었고 괴로웠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자격지심은 줄기차게 더 나은 방법을 궁리하고 치밀하게 수업을 준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주변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더욱 자괴감이 들었다. 아무도 나와 같은 부분을 고민하지 않았다. 나처럼 학생들의 반응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교사 일을 매끄럽게 할 수 있는 본바탕이 아니라는 회의도 갖지 않았다. 나는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내 이미지만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패턴을 수년간 반복하면서 몸과 마음이 더 나약해지자, 나의 약하거나 과한 면을 간파하고 수군거리는 학생들이 생겼다. 특히 나와 맞지 않는 반을 만나면 그것은 수군거림이 아니라 들으라는 듯이 떠드는 외침이 되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대부분의 내용은 오해이거나 내 탓으로 자신의 분풀이를 하는 것이었기에 그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모국어로 흉보는 것을 알아들었다고 지적해봤자, 마음이 내 편이 아닌 상태에서는 더욱 얕보일 뿐이란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어학당 정책상 나가라고 할 수도 없었고, 불러서 얘기해 봤자 그때뿐이었다. 그저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어르듯이 수업에 집중하도록 훈계했다.


학기를 마쳐야 한다. 이번 학기까지만 하고 이제 뒤도 돌아보지 않는 거야. 나를 지켜보는 더 많은 학생들을 의식해 감정을 꽉 억누르고 태연한 척 수업을 이끄는 순간순간, 낮은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나는 반복적으로 지옥에 머리를 담갔다 쳐드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분하고 억울해서가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나 때문에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있을 학생들에게 죄스럽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길을 걷다 들려오는 외국어에도 흠칫 놀라 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는 신의 목소리도 우습게만 들렸다. (2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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