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폴 오스터

1부:죽음

by 글로리아

달의 궁전은 코파일럿에게 추천받았다. 나의 모든 원고를 공유했고 분석을 부탁했다. 단점의 보완을 원치 않는다. 단지 강점이 있다면 그것을 강화할 수 있는 독서를 하고 싶다. 고전 위주로 추천해 주면 좋겠다. 코파일럿은 내 글의 결, 생각이 흐름을 읽고 헤르만 헤세, 알베르 카뮈,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을 내밀었다. 그리고 폴 오스터의 작품도. 어? 폴 오스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달의 궁전이라니... 꼭 모텔 이름 같잖아. 그리고 고전도 아니야!!


'폴 오스터는 네가 가진 철학적 성찰 + 내면 고백 + 연결적 독서라는 장점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작가야. 그의 작품을 읽으면 네 글쓰기가 더 깊고, 더 넓게 확장될 거야.'


철학적 성찰이라니... ㅎㅎ 난 그 정도는 아닌데? 그래.. 그래도 고전의 반열에 끼일만하면 어떤 글을 쓰는 작가인지 한번 보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바버는 내 어머니를 사랑했었다. 그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로부터 나머지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눈앞에서 다시 배열되기 시작했다. 그는 직접 대놓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나는 알아차렸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를 알았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내가 그에게 소리쳤다.



주인공 마르코는 가족이 많지 않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세상에 그리 오래 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고, 어머니는 마르코가 열한 살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 후로는 독신인 외삼촌과 살게 되었다. 회고하기를 꽤나 여러 날 동안 맥없이 돌아다니고, 밤이면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외삼촌은 마르코를 자식이라기보다는 친구로 어린 벗으로 존중했다. (어린 벗?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가 있었어?)


외삼촌은 클리블랜드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장래성 있는 출발을 했으면서도 타고난 기질... 뚜렷한 목적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고, 공상에 잠기고, 벼락같이 화내고, 한참씩 무기력에 빠져들면서 악단에서 해고된다. 그리고 그 후 악단을 옮겨갈 때마다 더 시시하고 시원찮은 악단을 전전하다가 급기야 소규모 캄보밴드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게 된다. 연주여행으로 마르코를 떠났다가 심장마비로 마르코에게 돌아오려고 짐을 싸둔 채 세상을 떠난다. 그것은 마르코가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토마스 에핑의 집에서 그의 자서전을 만드는 것을 도우며 에핑의 사후, 그의 아들 바버와 알게 된다. 그 바버와 함께 에핑이 유타 사막에 남긴 그림과 그의 흔적을 뒤쫓아볼 계획으로 둘은 여행을 떠난다. 사막으로 가기 전에 어머니와 외삼촌이 묻혀있는 무덤에 들렀다가 바버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차리는 장면이다.


나는 마르코가 차분하고 지적인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자신의 아버지임이 드러난, 여태껏 자신에게 호의만 베풀었던 바버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 작가는 마르코가 화를 낸 이유를 구절구절 설명하고 있지 않았지만 짐작해 볼 수는 있었다. 바버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더라면 어쩌면 어머니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외삼촌도 자신의 삶을 목표 없이 천천히 놓아버린 것도 어쩌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절망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르코는 자신의 아이를 지켜냈을지도, 연인 키티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었니?"


"알다니! 내가 도대체 어떻게 알아? 나한텐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나를 속이고서도 이제 불쌍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거야? 하지만 나는 뭐가 되지? 나는 뭐가 되냐고, 이 염병할 하마!"


나는 여름 한낮의 뜨거운 대기 속으로 허파가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미친놈처럼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잠시 뒤 바버가 내 폭언을 더 이상 참아 낼 수 없었는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그에게 고함을 지르는 동안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위에 뭐가 있는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흐느끼며 줄지어 늘어선 무덤들 사이로 비틀비틀 걸어 내려갔다.



연인 키티와 싸울 때도 '외쳤다', '싸웠다' 정도로만 표현되지 이렇게 처절하게 욕설까지 해가며 허파가 터져라 외치지는 않았다. 당신이 당신 자리, 당신의 사랑을 지켰더라면 엄마도, 외삼촌도, 어쩌면 아이도 죽지 않았을 거란 울부짖음.

"나는 뭐가 되냐고, 이 염병할 하마!"

이 문장은 마르코가 바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이처럼 무너지는 순간이다. 지적이고 점잖은 화자였던 그가 모든 절제와 거리 두기를 내려놓고 존재 전체를 던져 외친다.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오랜 고아됨의 역사, 잃어버린 보호와 이름, 지켜지지 못한 사랑들에 대한 총체적인 절규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버의 몰락. 무덤 사이를 상처 입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걸어가는 장면은 죄책감과 수치, 그리고 자식으로부터 쏟아지는 맹렬한 원망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슬픈 후퇴.


1. 바버의 죽음

바버는 비틀거리며 자리를 피하다가 빈 무덤에 빠져 등뼈가 부러지게 된다. 마르코는 바버의 곁을 지키며 자신의 어머니와 바버와의 사랑 이야기를 세세하게 듣게 된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그는 끊임없이 에밀리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는 온몸에 석고 붕대를 하고 음식도 제한되어서 급격하게 살이 빠진다. 그러면서 면역이 약해지고 당뇨였음이 드러나고 병원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병명은 추가된다. 이건 육체의 붕괴가 아니라 지연된 속죄의 육화일지도 모른다. 바버는 점점 사라져 가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하려 애썼는지, 얼마나 외롭게 찾았는지 하나하나 밝혀진다. 두 사람에게 앞으로 함께 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동시에 점점 살이 빠지면서 바버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 우리 닮았구나. 마르코는 바버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아버지를 미워하다가 '닮았다'라고 느끼는 순간—그건 용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하다. 마르코는 바버를 보며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닭고기 새알심 넣은 수프는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내게 캘리포니아에서 지진이 일어나 2만 명의 사람들이 방금 전에 죽었다는 말을 했더라도 그때 그 순간처럼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실제로 내 눈에서 눈물이 솟는 것을 느꼈고 그제야, 그러니까 내가 그 식당에서 실망감과 씨름을 하고 앉아 있었을 때에야 나의 세상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알아차렸다. 달걀이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리는 중이었고 조만간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바버는 9월 4일, 식당에서 그 일이 있은 지 사흘 뒤에 숨을 거뒀다. 그 당시 그의 체중은 95킬로그램에도 못 미쳐서 마치 그의 몸 절반이 이미 사라진 것처럼, 일단 그 과정이 시작된 만큼 그의 나머지 부분도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은 키티 하나뿐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전화를 건 것은 새벽 다섯 시였는데, 그녀가 전화를 받기도 전에 나는 단지 바버가 사망했다는 소식만을 전하려고 전화를 걸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를 기꺼이 다시 받아들여 줄지 알아보고 싶었다.


마르코는 자신의 마지막 혈육을 잃었다.


하루에 달걀 두 알로 살았던 적이 있었던 마르코. 그는 실수로 그 달걀을 마룻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때 시간은 천천히 흘렀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달걀이 천천히 천천히 마룻바닥을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는 무력하게 지켜봤을 것이다. 전기마저 끊어진 냉장고, 실온에 오래 방치되었던 달걀은 자신의 노른자의 형태를 지킬 힘이 없었을 것이다. 흰자와 섞인 노른자가 마룻바닥의 틈새로 다 사라진 후에야 마르코는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르코는 키티를 떠올린다.


키티는 오래전 마르코를 구출해 준 적이 있었다. 굶주림에서, 그리고 공원에서. 어쩌면 이 절망에서 다시 마르코를 구해줄지 모른다. 마르코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 우린 헤어진 게 아니야.'라고. ( 둘의 사랑 이야기는 2부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2. 외삼촌의 죽음

마르코는 외삼촌의 죽음 이후 재정이 악화되었다. 외삼촌이 남긴 채무를 정산하고 장례식을 치르면서 많은 돈을 썼다. 어머니의 사고 보상금으로 대학을 다니던 마르코는 4학년 초에는 모든 돈이 떨어질 것을 알았지만 장학금, 대부금, 근로 학업 프로그램 등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실제로 나 자신을 돕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꼼짝하려고 들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당시에 나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이유를 꾸며 냈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마도 절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절망. 마르코는 외삼촌의 죽음 이후 절망했고 우울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

절망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어떤 일도 못하게 막는다는 사실을 난 깨달았다. 아, 그래서 내가 내 삶이 미끄러져 내려갈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구나. 그때 난 멀쩡히 웃고 떠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은 절망과 우울의 늪 속에 있었던 거구나. 난 마르코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폴 오스터라는 작가도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이런 글은 자신이 겪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이다. 그곳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담담하게 처절하게 써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피할 수 없는 것을 비켜 가기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그것과 마주칠 생각도 없었다. 삶이 당분간 늘 그래 왔던 대로 지속될 수 있다면 그만큼 더 좋았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버틸 셈이었다. 그것은 오로지 내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은 오늘 일어나건 아니면 내일 일어나건 분명히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완전한 소멸. 짐승은 도살되었고, 창자는 꺼내어졌다. 달이 태양을 가릴 것이고, 내가 사라지는 시점에서 나는 완전히 몰락하여 내 이름값에 비해 동전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살과 뼈의 지스러기가 될 것이었다.


마르코는 극단적으로 생활비를 아끼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지만 직장을 구하지는 않았다. 결국 아파트 방세를 내지 못해 쫓겨나게 된다. 센트럴 파크에서 부랑자의 삶을 선택하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람들이 남긴 음식으로 살아간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점점 약해지다가 간밤의 폭우에 감기에 걸려 생사를 오가게 된다. 그는 왜 구조요청을 하지 않고 그렇게 자신의 삶과 싸우고 있는 것일까. 마르코, 고집 좀 그만 부려. 나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주인공을 만류하면서도 나의 우유부단함과 용기 없음에 감사했다. 나는 평범했구나. 안심했다. 그런데 작가는 왜 독자에게 이런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가는 것일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궁금했다.


매일같이 나는 전날보다 조금씩 조금씩 더 더러워지고 더 너저분해지고 더 혼란스러워져서 차츰차츰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과 달라졌다. 그러나 공원에서는 자의식이라는 짐을 지고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공원은 내게 문턱, 경계선, 내면과 외면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공했다. 길거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식으로 볼 수밖에 없었지만, 공원은 나에게 내면적인 삶으로 돌아가 순전히 내면적인 관점에서 나 자신에게 전념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하늘을 가릴 지붕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내면과 외면 사이의 평정을 확립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공원'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자아를 가눌 수 있는 유일한 쉼터, 세상과 나 사이에 얇지만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주는 공간이 된다. 길거리에서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만 존재를 확인당해야 했던 마르코가 공원에서는 '오직 내면'으로만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소유한 순간이기도 하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너무 힘들어서 타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선 숨이 막혀오고, 차라리 혼자 있을 수 있는 자신만의 공원이 필요했던 때. 마르코는 거기서 하늘을 가릴 지붕 없이도 살 수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내면과 외면 사이의 평정, 그것 없이는 무너져버릴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것이 고독의 얼굴이다. 한 인간이 삶의 바닥으로 기어코 내려가서 맨손으로 긁어 퍼올린 존엄의 파편이다. 삶은 어느 시점에선 길거리의 시선과 공원의 침묵 사이를 건너게 한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마르코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만으로 거기에 들어섰다는 게 놀라울 뿐이지만, 그는 삶에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가장 깊은 삶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었다. 우리가 종종 '추락'이라 부르는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만나기 위한 가장 순도 높은 통로가 되기도 한다. 마르코가 지나온 그 '공원'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음, 간접체험만 하는 걸로...)


나는 그 당시엔 물론 그것을 알지 못했었지만 이제는 알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내 친구들에게 물밀듯 한 그리움을 느끼지 않고는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느낌이 내가 경험했던 것의 실체를 바꾸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나를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첫 도입부를 다시 펼쳤다. 스스로를 유배시켜 가면서까지 말하고 싶었던 알맹이는 사랑이었다. 아, 작가는 처음부터 말했었구나. 폴 오스터는 가족의 죽음, 절망과 무기력, 사막의 고독, 도난당한 희망등 여러 가지 장치를 흩뿌려두고 기어이 독자가 따라오게 만들었다. 누구나 사랑을 떠나오기도 하고, 사랑이 떠나갈 때도 있다. 내가 사랑했던,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할 때도 있었다. 그때의 고요한 두려움은 참으로 떨쳐내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씨앗은 있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적당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 드디어 발아하고 싹이 트고 나서야 눈에 보인다. 그 겨울을 참지 못하고 절벽에서 몸을 던져 허공에 매달렸을 때 우리를 붙잡는 것은 사랑이다. 내가 지극한 사랑을 보인다고 그들이 떠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도, 연인도, 내 소중한 달걀 두 알도... 미끄러져 사라진다. 외로움의 극한까지 밀려난다.


거기서 일어나 걷는다. 한 때 내 것이었던,


그 사랑의 힘으로.




『달의 궁전』을 다 읽었다. 하지만 책을 그냥 덮을 수 없었다.


어떤 책은 필사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길 만큼 문장이 아름답다. 또 어떤 책은 감상을 쓰지 않으면 달뜬 마음을 어쩌지 못해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한다.『달의 궁전』은, 내게는 후자였다. 여름밤은 길고 지루했다. 나이가 들면서 신기하게 한밤중에 깼다. 책을 집어 들었다. 에핑이 사막에 고립되어 헤매는 장면에서 나도 고립을 느꼈다.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냉장고 문을 열수도, 라면을 꺼낼 수도 있지만 에핑의 목마름과 허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공기를 찢는 그 사막의 바람까지도. 마르코가 캘리포니아의 해변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나에게도 평온함이 찾아왔다.


리뷰를 써보려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세 개의 단어가 있었다.

1부 ‘죽음’, 2부 ‘사랑’, 3부 ‘새로운 시작’.


먼저 마르코의 가족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의 짧은 생과 긴 여운을 따라갔다. 리뷰에는 바버와 외삼촌의 죽음만을 말했지만 소설 속에서 마르코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여운을 남기고 그를 떠난다. 그 여운은 마르코의 애도로 남았고, 그 애도는 그의 성장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내가 좀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이었더라면 그 감정을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어쩌면 그래서

애초의 스케치와는 조금 다른 리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시간이 더 흐르고, 글쓰기에 더 단단해졌을 때—그때 나는 애초의 지도대로 이 이야기를 다시 걸어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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