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18년 9월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월차까지 사용해 만든 약속이 깨지면서 맞닥뜨린 실망과 시간의 진공에 굶주린 사람처럼 무엇이든 채우려 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화 관람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의지가 생기지 않아 정처 없이 걸었다. 마침 마주친 국립중앙박물관 모네 특별 전시회. 미증유의 끌림. 중력은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움직였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시회 관람을 했다.
이러한 순간을 세렌디피티라고 해야 할까 에피퍼니라고 해야 할까. 이후 1년에 많게는 12번, 적게는 6번 정도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이러한 촉발된 감흥은 미술사, 사진, 미학까지 전이되어 더욱 악화되었다.
그렇게 미술은 내 삶 깊숙한 곳에 들어와 똬리를 틀고 웅크리며 나를 지켜봤다.
한편, 한쪽에선 의구심이라는 (사과나무 모양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흔히 전문가나 비평가들이 말하는 해석이나 분석들을 읽다 보면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극단으로 갈리고, 그마저 그들만의 언어를 이해 못 하면 미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점차 자라는 의구심. 어느새 내 키를 훌쩍 넘었다. 타자들이 그것도 힘 있는 타자들이 만든 세계 속 미술 관람이 불편했다. 유아적( 주체적) 관람을. 보고 느끼고 싶은 욕망이. 맺기 시작했다.
주체(유아론)적 감상에 필요한 것은 오로지 그림과 나만 있으면 된다. 작가의 생애, 미술 기법, 역사적 맥락 등 일체의 객관적 사실을 배제한 관람이다. 그림의 아우라에 예민하게 공명하는 감각(의 에테르)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감각을 표출하려 한다. 추상표현 글쓰기(매질)로 하루키의 생각과 공명하려는 이들에게 영감과 재미를 주고 싶다.
어떤 방법, 해석, 분석을 하는 것이 아닌, 각자의 방식대로 그림을 즐기고 감동하고 숭고미를 느끼길 바라며... 『의삭안의 미술관을 꿈꾸며』 연재 이어가겠습니다 ...
* 하루키의 글 그림 감상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먼저 그림과 글을 전체적으로 보고 읽습니다.
2. 그리고 필요에 따라 원하는 부분을 봅니다.
3. 복잡하시죠? 그렇다면 자유롭게 보고 감상하세요.
4. 감상은 오롯이 감상자 개개인이 느끼는 감동입니다.
"완고하게 길들여진 귀에는
새로운 음악이 늘 소음으로 치부된다.
음악이란 결국 짜임새를 갖춘 소음일 뿐이다." _1일 1클래식
완고하게 길들여진 (그림) 감상은
모방(타인의 감상)일 뿐이다.
나만의 고유한 감동을 찾고 공감하고 싶다. _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