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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션, 네 존재 자체가 저주야

넌 쓰레기야

by 하루만

"이걸 당장 바꿔야겠어."

요리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풀리고 행복하다는 이 남자는 동공지진을 잃으키며 동그라미 세 개를 향해 마구 손가락질을 해댔다.

"저런 걸 쓸 만하다고 넣어놓은 거야?"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던 그는 자신의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인덕션을 향해 열을 내뿜고 말았다.


이사 와서 가장 큰 스트레스 주범이 바로 화구다.

예전 집에서 중국집 같은 강력한 불맛으로 화끈하게 요리하던 그에게 인덕션이 웬 말인가.

슬프게도 불은 잃은 그의 뒷모습은 마치 지구의 종말을 보기라도 한 듯 어깨가 축 쳐진 채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졌다.

불쇼를 하던 그의 모습


"이제 요리는 내가 할게."

조리기구가 구식이라 불편하다고 당장 신상으로 바꿀 돈은 준비되지 않았다. 저 남자의 분노가 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굳이 매번 이렇게 화를 내는 그도 문제라고 여겼다.


"요즘 인덕션은 10초 만에 물이 끓는다던데?"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의 나는 일자로 앙 다문 입을 겨우 열어 정보만 흘려보냈다.

'어찌 됐건 이 상황을 인정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것만이 살 길 아니겠니?'


나는 2주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식사를 차렸고 그는 그런 나를 지켜봤다. 구식과 함께하는 요리여정은 별게 없다. 다이얼을 돌려 시커먼 동그라미가 연탄불처럼 빨갛게 달아오 그제야 지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팬이 가열된다. 한마디로 내가 잘하는 오래 참음과 인내가 필요한 셈이다.


당최 흥분이나 분노 없이 무표정의 주파수 하나로 요리하는 나를 힐끗 보더니 그 남자가 드디어 입을 뗐다.


"오늘은 주말이니까 내가 애들 짬뽕을 해줄게."


'여기 이 도구로?

아니. 하지 말어. 그냥 내가 할게.'


끝까지 말려 보려 했으나 그는 몸이 근질근질거리는지 요리를 안 하곤 못 배겨 결국 칼을 잡고 말았다. 배추, 양파, 파를 썰고 목이버섯을 생으로 준비했다. 다양한 해산물과 채썬고기까지 재료손질이 완벽히 끝났다.


그런데 어찌 불안 불안하다.

"인덕션 바꾸지도 않았는데 이걸로 해도 되겠어?"

"일단 냄비를 달구면 볶는 건 문제없어."

달궈진 냄비는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기와 채소를 볶아냈다.

'휴, 여기까지는 괜찮네.'


허나 냄비에 육수를 부은 뒤부터 마음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참을 인을 그려대며 서 있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짬뽕 육수는 마냥 평온한 호수같이 변함이 없다.


한참이 지나도 전혀 끓어오를 생각이 없으니 이를 어쩐다.

'저 사람 또 성내는 거 아냐?'

힐끗거리며 눈치를 보는 내 마음이 울렁거린다.


아무 반응 없는 냄비 앞의 남자, 그의 뒤통수 위로 분노와 체념을 오가는 길 잃은 그의 영혼이 보이는 듯하다.


"이게 이런다니까. 세월아 네월아."

똥 씹은 얼굴을 한 그는 겨우 육수가 끓기 시작하자 참아왔던 시간이 억울한 듯 지체 없이 해산물을 떼려부었다. 그러자 겨우 보글보글 일어나던 방울들이 아예 사라지고 일순간 표면이 멈춰버렸다.


'헉'

순간 철렁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저 양이 빠르게 끓어오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 요리 못하게 할걸.'

후회가 태산같이 쏟아졌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콧잔등이 실룩거리더니 귀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탁"

그는 볶던 나무주걱을 싱크대에 세차게 집어던졌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짜증이 마찰음과 함께 튕겨 나왔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소란스럽던 아이들이 입을 벌리며 소파에서 서로 기댄 채 얼어붙었다. 거실의 공기가 한순간에 식어 싸늘해지며 온 가족이 이 남자의 폭발을 예상다.


"화르륵 불이 일어나서 금세 끓여내야 되는데 여기서 삶고 지지고 하고 있잖아. 이러면 해산물에서 비린맛이 난다고!"

맛이 최고일 때 짠하고 요리를 차려주고 싶은 그의 마음만큼 화는 에베레스트 정상을 찍어버렸다.


"난 이거 안 먹어."


열이 아닌 화로 달궈진 그의 등판이 후끈거린다.

강력한 불이 아닌 미지근한 열만 품은 인덕션 위에서 그의 요리는 불맛이 아닌 떡진 맛이 되어버렸다.


"저건 완전 쓰레기야!"


하찮은 너라며 소리를 질러대는 남편입에서 나온 문장이 날 슬프게 한다.


결혼하고서 가장 날 당황하게 했던 말이었다.

분명하게 이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털어놓은 어릴 적 상처받은 이야기들은 "나는 부모의 기쁨이 아니었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지금 한다고? 이미 결혼했는데.."

가히 충격적인 스토리라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도 며느리인 나와 손주들을 사랑해 주신 시부모님이 어째서 그들의 아들을 기뻐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준 순간보다 그들의 뜻에 맞춰 살길 강요한 시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로 인한 상처들은 아버지와의 불화를 돌이키기엔 너무 깊고 날카로웠다.


부모가 필요한 순간 그들에게 거절당하거나, 내가 잘하고 열심인 일에 대해 비난당하거나, 부모가 훈육이란 명분하에 폭력을 일삼게 되면 아이는 "나는 저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라게 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


며칠 뒤 흥분을 가라앉힌 그는 200만 원이 넘는 삼성 인덕션을 기웃거리다 뒤지고 뒤져 인터넷가 60만 원짜리 하츠 인덕션을 도매업자에게 47만 원에 엎어왔다.


"사이즈가 딱이네."

알고 보니 원래 이 집에 있던 것은 인덕션도 아닌 구식 하이라이트였다. 그러니 더 속이 탔지.


인덕션에 익숙해진 남편은 요리를 할 수 있어 너무 기쁜 나머지 학교 가는 애들 아침까지 해대며 난리법석이다.

"여보 이게 뭐야, 아침은 간단히 먹음 되는데 이건 투 머치야."

나는 절대 주지 않을 소시지만 3종류에 반찬도 밥도 한가득이다.

"엄마 왜 그래? 맛만 좋은데."

밥을 먹는 애들도 아침을 차려주는 아빠가 신기한지 밥상을 깨끗이 먹고 일어난다.


시끌벅적한 애들이 떠나고 난 뒤 조용해진 집에서 그릇을 치우며 남편이 말한다.

"우리 애들은 참 다행이야."

"뭐가?"

"내가 어릴 때 가져보지 못한 행복을 누리잖아."

여보, 당신한테는 내가 말해줄게.

"당신 자체가 우리의 기쁨이야."



요즘 그는 인덕션으로 온갖 요리를 펼치고 있다.위 사진은 백합조개로 만드는 바지락술찜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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