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깊어지려고
"띠르르르릉"
'아, 저거 타야 되는데!'
있는 힘껏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왔지만, 내 눈앞에서 문이 닫히고 말았다.
"아.."
더위에 지친 나는 떠나는 지하철 5호선 열차를 맥없이 바라봤다.
'다음 열차는 10분이나 기다려야 되네.'
한숨을 쉬며 선로와 승강장 사이에 설치된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멍하게 풀린 눈은 유리문 위에 적힌 시 구절에 멈춰 서더니 아무 생각 없이 읽어 내려갔다.
아이가 아프고 나면 키가 자라고
어른이 아프고 나면 영혼이 깊어진다
"영혼이.. 깊어진다.."
중얼거리며 따라 읽는 소리와 함께 내 시커먼 가슴 밑바닥에 글자가 타이핑된다.
아프다 못해 너무한 밤들을 숱하게 지새우며 남편은 소주로 울고, 나는 뒤돌아 몰래 운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엉켜 붙은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작업은 더디기만 하다.
"너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면 꼭 힘든 여행지를 같이 가봐."
평소엔 드러나지 않는 진짜 성격을 보라며 사람들은 조언한다. 여유로울 땐 성격이 좋았던 사람도 첩첩산중 문제가 터지며 체력저하까지 이어지면 그 사람의 밑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정의 위기에 이어 이제는 경제적 위기까지 당한 우리는 밑바닥이란 바닥은 다 내려온 것 같다. 너와 나, 부부사이 서로의 약점은 이미 간파당하고도 남았으니 말이다. 이 못난 약점을 품고 같이 살아내느라 우리는 경청을 배우고, 상대를 긍휼히 여기며, 폭발하는 감정 뒤 숨은 욕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
영혼은 상처를 통해 깨어난다.
미국의 사상가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은 영혼을 세워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약점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는 '결핍'이나 '상처', '약점'이야말로 영혼을 형성하고 성장하게 하는 핵심 요소라고 말한다.
돌아보면 2020년 가정이 깨져버릴 위기 앞에서 나는 무너졌고 흔들렸다. 그러나 5년이 지난 지금까지의 그 과정은 진짜 나를 찾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엔 가슴을 치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거냐고 통곡했다. 감당할 수 없다며 결혼생활의 상처가 된 남편을 내 인생에서 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고통의 강을 함께 건너며 생각지못했던 우리만의 서사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이제는 이 고통이라는 요소가 우리가족에게 어떤 지혜를 알려주었는지 나눌 수 있고, 같은 문제를 처한 타인을 더욱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러닝을 시작했다고 했다.
"제가 몸이 자꾸 붓고 아프면서 계속 우울감에 시달렸어요. 그런데 뛰다보니 그동안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제 심장소리와 발의 감각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녀는 러닝으로 건강을 조금씩 회복하며 일기를 통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지난 5년의 괴롭고 아픈 시간 동안 나를 탐구하게 된 것 같아. 그렇게 이제 나를 좀 알겠다 싶으니까 이번엔 경제적 어려움이 덮쳤잖아. 내가 지금을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야."
통하는 상대를 만나 그런지 평소 꺼내지 않는 속 이야기가 술술 이어졌다.
"이불을 덮어쓰고 닥친 현실을 보지 않겠다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며 매일 선택하는 거지. 나의 길을 걸어가기로."
이 말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언니, 울지 마요. 잘하고 있어. 이 와중에 그만큼 하면 잘해나가고 있는 거지."
그녀는 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다독였다.
그녀도 나도 각자의 고통을 통해 영혼의 진짜 얼굴을 만나러 가는 중일테다. 벌써 1년 반을 지속하는 어려움을 견디느라 지친 우리 부부도, 다 '아프고 나면' 깊어진 영혼을 마주하고 싱긋 웃게 되는 날이 올 테지.
그러니 서로의 약점을 쥐어 잡고 물어뜯으며 싸우지 말고,
우리 영혼이 자라는 틈으로 내어주자.
멋져질 일만 남은 고통 속의 우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