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된 지연
"위이이이잉."
나는 아이 둘을 낳고도 그대로 다시난 머리카락 덕분에 머리를 말릴 때면 총 세 번의 드라이를 해야 한다. 특히 뒤쪽에 숱이 많은 편이라 와트수가 높은 고출력사향의 드라이기가 꼭 필요하다. 이 날도 역시 오른손에 드라이기를 잡고 왼손으로 뒷머리를 사정없이 털고 있는데, 갑자가 드라이기가 먹통이 됐다.
"딸각딸각"
전원버튼을 다시 위아래로 옮기며 시동을 걸어보는데, 이제 나 좀 그만 괴롭히라는 듯 전혀 반응이 없다.
"세상에, 진짜 드라이기가 고장 났나 봐!"
나는 드라이기를 집어던지고 거실로 뛰쳐나갔다.
양팔을 브이자로 하늘을 향해 뻗고는 빙그르르 돌며 믿기지 않는 이 사실에 입이 귀에 걸려버렸다.
"이제 새 드라이기 살 수 있는 거야?"
너무 기쁜 나머지 양손을 교차해 어깨를 감싸 안으며, 겨울왕국 엘사 공주님 원피스라도 살 마냥 설레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이 드라이기로 말할 것 같으면, 6년 전 마트에서 구매한 후 여태껏 써왔던 나의 오랜 친구다. 사실 언니와 엄마의 내돈내산 다이슨 구매후기에 혹 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지조를 지켜낼 수 있었던 건 단순 자의만은 아니었다.
몇 번의 이별을 맞이할 일이 있었으나, 반 강제적으로 계속 쓰게 된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내 드라이기가 고장 났네. 역시 이것도 소모품이야. 특히 당신 드라이기는 미용실 오픈선물이라 진짜 싸구려잖아. 우리 이제 좀 바꾸자."
새로운 아이를 들이고픈 내 뜻을 모른 채하는 건지 남편은 드라이기를 가져간다.
"고치면 되지."
그는 손재주가 좋아서인지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칠 노력을 한다.
"여길 청소 해줘야 해."
남편이 드라이기 뒤쪽 그릴 부분을 떼내어 칫솔로 박박 문지르며 내게 청소법을 알려준다.
"와~우리 신랑, 못 고치는 게 없네. 대단해 정말."
열정의 심폐소생술로 죽어가던 드라이기를 살려낸 남편은 자부심이 가득 차오른 얼굴이다.
"봐, 작동되지?"
그렇게 몇 번을 죽어가던 드라이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구세주 남편에게 새 생명을 연장받고 또 연장받았다.
그런 드라이기가 이젠 진짜 작동을 하지 않으니, 고이 접어두었던 속내를 꺼내본다.
"드디어, 자유다!"
서랍 속 넣어둔 기대감을 꺼내 들고 쇼핑의 장으로 뛰어들었다.
모터부터 와트수와 다양한 옵션들을 확인하는 나는 만면의 미소를 띠었다. 당장 나의 불편을 두고 볼 순 없는 일, 꼭 필요한 구매를 미루는 일은 가당치도 않다. 이미 결제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마음으로 클릭을 부르는 아이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문득,
"아니다. 오늘 사지 말자."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드라이기나 청소기 같이 평소에 매일 써야 되는 가전이 고장 나면, 앞도 뒤도 안 보고 바로 새 물건을 찾아 결제한다. 잠깐의 불편도 겪지 않겠다는 각오로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가려내 품 안에 들이는 것이다.
그런 내가 사지 않겠다니! 또 몇 년간 품었던 기대란 말인가. 당장 실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상하다. 지당한 명분을 가진 소비를 일부러 지연하겠다니.. 왜 이런 마음이 든거지?'
나는 좁아진 집만큼 요즘 소비 또한 일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자신에 대해서는 제일 관대한 게 인간이라니 참 웃긴 일이다. 다른 부분에는 지출을 제로로 만들어도 내가 힘든 건 못 보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고나 할까?
'그거 없다고 당장 죽는 거 아니잖아?'
늘 하던 사고의 공식을 살짝 바꾸니 이게 또 새롭다.
'그렇지.. 애들 화장실에도 고물이지만 드라이기 있는데.'
어떤 걸 살지 천천히 생각해 보면서 고르는 게 더 좋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날로 더 이상 드라이기 알아보는 일을 그만뒀다. 계획된 지연은 생각보다 나를 불편하게도, 나를 힘들게도 하지 않았다. 머리를 말리는 공간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했을 뿐이다. 매일 엄청 세심한 고도의 헤어스타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닌지라 선풍기로도 말리면 그만이었다.
'인간의 사고가 이렇게 우스운 것이었나?'
최우선시되던 나의 편리를 조금 미뤘는데 마치 삶의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철학자가 된 기분이다. 나의 필요에 쓰려던 돈을 허리가 아픈 엄마에게, 새로운 아이템을 팔고 있는 지인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니 삶이 확장돼 보였다.
주말에 내가 신청한 체험단 때문에 온 가족이 같이 이동할 일이 있었다. 한 주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일 때문에 시달리는 모습을 본 지라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온 남편이 신경 쓰였다.
"우리 오랜만에 나왔는데, 근처 가볼 만한 곳 구경 좀 하고 갈까?"
남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말을 했다.
"가면 되지."
그는 늘 오케이다.
쨍하게 땅을 달구는 해를 맞으며 걷고 돌아다니다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내가 말했다.
"다들 여길 봐. 내년 달력에 싣을 사진이야."
덥다고 징징대던 아이들과 남편이 찡그린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찰칵."
"진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요즘 내가 그렇게 느낄 만큼 눈코 뜰 새가 없잖아."
남편이 야식으로 시킨 통닭 다리를 뜯으며 말한다.
"당신이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지. 여러 개를 동시에 신경 쓰려니 몸은 하나인데 벅차지."
남편을 마주 보고 앉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하잖아. 근데 아까 피곤해서 진짜 더 걷기도 싫었거든.
그때 네가 사진 찍는다고 보라는 거야."
튀긴 닭고기의 영원한 짝꿍 소맥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그가 말을 이었다.
"찰나더라. 행복이라는 게."
사진 찍기 싫어하는 그가 '달력에 넣을 사진'이라는 말에 몸을 돌려 서 있다.
"찰칵"
셔터가 눌러지는 찰나,
아빠와 나란히 서서 장난스러운 동작을 하는 아이들.
그 위로 흩뿌려지는 햇살과 살짝 드리운 구름 위 파란 하늘에 뜬 열기구, 길게 늘어선 성곽과 구경하는 사람들, 뜨겁게 데워진 그곳의 공기까지 그 공간의 모든 것이 겹겹에 쌓여 찰나가 된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라며 행복을 지연시켰던 그가 찰나의 행복을 깨달은 날.
그런 그와 함께 추억을 쌓는다.
'그래, 행복은 지연이 필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