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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아름다운 것들

에필로그

by 하루만

유치원 시절, 나는 집 뒤의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가길 좋아했다. 사실 좋아했다기보단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심심하면 밖으로 나가는 게 으레 당연한 코스였다.


주택에 살던 때라 옥상에 올라가 사다리 건너기로 게임을 하기도 하고, 먼지 풀풀 날리는 창고에 들어가 숨은 보석이라도 있는 마냥 곳곳을 뒤지기도 했다.


그것도 심심하면 우리 집 자매들은 엄마를 대동해 집 뒤 동산을 탐험하러 올라갔다. 약간의 오르막길을 따라 정상이라는 곳에 도착하면, 달랑 철봉하나 외엔 아무것도 없는 그냥 풀천지였다.


들쑥날쑥 제멋대로 자란 풀들 사이를 마음껏 뛰어다니며 놀다가 언제나 마지막엔 토끼풀밭으로 모였다.





세 장의 잎이 연출한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하트의 크로버밭은 모두 우리 차지였다. 초록의 사랑이 가득한 그 밭에는 연약한 목을 쭉 빼고 있는 흰 토끼풀들이 가득했다.


넓은 밭 한가득 작고 동글한 흰 꽃들이 몽글몽글하니 맺혀있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뛰어논 만큼 배가 고팠지만 아무도 집에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야들한 꽃대를 꺾으며 누가 더 가지겠다고 싸울 일도 없었다.

가만히 꽃을 바라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작디작은 흰 꽃송이를 꺾어 반지를 만든다. 공을 들여 만들 일도 없이 그냥 묶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7살 아이 손가락힘은 영 시원찮다.


"왜 자꾸 안 되지?"

엄마의 약지에 꽃대를 두르고 묶다 풀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힘을 조절해 당기니 마침내 엄마의 손가락에서 토끼풀이 반짝인다.


"와~엄마 봐봐!"

엄마가 손바닥을 쫙 펴니 그제야 7살 나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나의 온 우주가 엄마이던 시절, 그 엄마에게 여리여리한 풀꽃 하나로 최고의 사랑을 건넨 순간이다. 그 보잘 없는 흰 꽃이 엄마를 백배는 이쁘게 만들어주었다.






내게 '더 좁은 집으로의 이사'는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불맛 요리를 사랑하는 남편이 인덕션을 받아들이며 인내심을 넓히는 일, 물건 따위를 쟁여두지 않겠다는 내 소비의 변화, "엄마, 미원!"을 외치지만 집안살림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아들의 마음, 삶의 영위를 위해 무엇이든 시작할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은 보석들을 내어놓으며 연재를 마치려고 했는데, 세상에 중 가장 작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엊그제 발견하고야 말았다.


엄청난 중압감과 책임감에 휘둘리고 있는 남편은 이사 온 후 극도로 예민해졌다. 어디다 스트레스를 풀 곳도 없이 몇 개월을 지속하고 있으니 그 속이 어떨까. 그런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술 한잔으로 스트레스 푸는 남편이 한번은 술에 취해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왜 저럴까? 힘들다고 꼭 술을 마셔야 되나? 온 가족을 힘들게 하는 걸 자기는 모를까? 힘들수록 운동을 하고 정신을 차려야지 저렇게 살아선 안돼.'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그를 잘못된 사람으로 판단했고, 이 결혼에 대한 후회까지 몰려올 판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작고 아주 아름다운 것이 그 순간 모든 상황을 뒤바꿨다.


"수고했어, 여보."

저번과 똑같은 상황이지만 그를 위한 기도 덕분에 내 입에서 튀어나가게 된 이 한 마디는 그를 흥분하지 않게 만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아이들과 현관으로 뛰어나가 서로 얼싸안고 뱅뱅 돌기 시작한다.

"뭔데, 와 이라노."

당황한 부산남자는 경상도 사투리를 더 심하게 내뱉는다.

"아빠, 수고가 음청 많네요."

아들은 낯짝 부끄러운 말을 자기식 표현으로 아빠에게 들려준다.

"여보, 오늘도 수고했어."


작은 말, 작은 포옹이

위태한 밤을 지나가는 우리를 살린다.

작지만 아름다운 오늘 밤.



[더 좁은 집으로 이사 갑니다]를 읽어주시고 라이킷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브런치북은 여태껏 모두 저의 가족이야기였는데

다음번 연재에서는 '나'에 대한 탐구로 시각을 좁혀가보려 합니다.


장마철 무탈하시고

저는 더 나은 글로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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