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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만 Oct 24. 2024

요리를 보면 성격이 보인다

#9

2020.10월


이쯤부터 남편은 고기 굽기를 넘어 요리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문제는 장보기부터 재료손질, 요리법과 실시간 요리진행 그리고 설거지까지 모든 단계에 내가 참여해야 했다. 그러니까 쓰리스타 셰프의 지시에 "예, 셰프!"를 외치는 수석주방장도 아니고, 이제 갓 태어난 셰프 옆에서 소위 시다바리 노릇을 감당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칼질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메인메뉴 하나 만들겠다고 했을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승낙을 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의 유튜브 스승들이 하나 둘 늘어만가고 주방이 실험실이 되어 가는 것이 왠지 심상치가 않다.


"가락시장 가볼까?"

엉덩이가 가벼운 나는 남편이 어딜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는 게 별로 귀찮치가 않다. 가락시장에서 자주 회를 떠 오는 신랑은 요즘 축산에도 들러서 자꾸 구경을 하고 계신다. 아직 오늘의 메뉴를 말 안 하는 걸 보니 아직 먹고 싶은 메뉴가 떠오르지 않았나 보다. 수산코너를 쭉 둘러보다 네모 각진 유리안에 종류별로 담긴 조개들을 마주쳤다.

"와~ 동죽 좋네. 오늘 우리 동죽사서 바지락 찜해먹자."

탕탕탕. 이로써 오늘의 메뉴는 바지락 찜이 되시겠다.


요리하는 걸 보면 성격이 보인다고 그동안 몇 번했던 조개해감이 영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열심히 검색을 하신다.

"바다의 염도가 35%네. 그럼 이 염도를 맞춰서 해감을 시켜보자."

저울을 꺼내더니 그리 신중하게 소금을 재고 바닷물을 제조하신다. 매 단계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실험해 보는지 누가 보면 전 인류를 구할 암 치료제라도 연구하는 줄 알 판이다.


이 동죽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얼마 전에 남편이 처음 꼬막요리를 했는데 그가 재료손질하는 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글쎄 꼬막을 새하얗게 화이트닝 시켜놓은 것이 아니겠나! 둥근 부채꼴 껍질의 끝부분에 채워진 검은색 줄들이 꼬막의 시그니처인데 세상에 없다 없어. 이 분을 완벽주의자라고 할지 정신병이 있다 해야 할지..



동죽은 화이트닝 중


좋은 요리의 기본은 재료에 있다 말하는 남편은 원하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지구 끝이라도 가실 분이다. 학생 때 적성검사에서 택시기사가 나왔다더니 정말 마가 끼인 건지 사실 결혼생활하는 동안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산 날이 많다. 시간만 되면 떠나기를 즐기는 사람인지라 제철재료를 사기 위해서, 거기에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서라는 좋은 명분까지 붙이니 그는 콧바람 쐬고 나갈 스케줄을 정리하느라 더 분주해졌다.


모르는 게 있을 때면 알아보고 답을 찾다가, 해도 해도 안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이 분은 적당히가 없다. 한마디로 끈질기다. 그의 그런 기질을 아는 터라 그가 자신의 요리가 맘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을 때면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해결을 볼 때까지 도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요리를 여러 개의 레시피로 하실지가 걱정되기 때문이다. 아빠가 요리를 A-Z까지 연구순서대로 하게 되면 나와 아들들은 미세한 그 변화를 시식하고 느껴진 사실만을 말하며 진지한 토론을 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첫째의 입맛이 타고났다는 것이다.

"아빠, 다 씹고 나서 마지막에 살짝 신 맛이 나는데?"

"아빠, 이번 거보다는 제일 처음 레시피가 나아요. 이건 소스가 안 어울려."

하다못해 요리에 어떤 걸 첨가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맞히니 매끼 밥을 해줘야 하는 엄마에겐 그 사실이 고역인데, 자신의 요리를 평가해 주길 바라는 아빠에게는 이만한 기쁨이 없다.


어찌 됐든 이런 남편요리의 시도는 우리 가족의 평화와 안녕에 꽤나 도움이 되었다. 부부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소통할 공통의 주제가 있다는 것은 건강한 가족을 일구는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한 식탁에서 다 같이 저녁식사를 해도 각자 폰만 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요즘이지 않은가.

"엄마, 내 친구는 집에서 가족들끼리 말을 안 한대."

학교를 갔다 온 첫째가 대뜸 말했다.

"그럴 리가, 대화를 안 하고 어떻게 생활을 해."

"진짜 필요한 말만 하는 거지. 우리 반 어떤 여자애는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셔서 자기를 신경 안 쓴대. 자는 척하다가 이불 뒤집어쓰고 새벽까지 게임한다던데."

주 3회 이상은 온 가족이 모여 아빠요리 시식회를 하는 우리 집과 비교하니 이상도 할 만하다.


내가 신기한 것은 요리가 그토록 재밌다는 남편이다. 자신의 본업을 잘못 정한 거 같다며 억울해할 정도니 말이다. 딴 데 정신 못 쏟게 신이 부캐를 정해주셨는지 그가 요리를 좋아하고 가정에서 그 자리를 도맡아 채워주니 너덜너덜하게 찢어졌던 가정의 금이 아주 서서히 붙기 시작했다. 깨진 접시를 붙인다고 그 깨진 자국이 없어지는 게 아닌데, 왜 인지 모르게 아빠의 부캐와 달려온 4년 동안 우리는 받은 상처에 새 살이 돋았다고 말해야만 될 거 같다. 영화 속 히어로가 엄청난 재생력을 가져 총에 맞아도 바로 새 살이 나고 깨끗해지는 것처럼 우리 가슴 깊숙이에 상처의 흔적 하나쯤은 남았을지 몰라도 겉으로는 온전한 새 그릇이 되어 가는 기적의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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