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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고추

#꽈리고추소고기장조림

by 하루만 Dec 10. 2024

1995년 방영했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을 아시는지? 목욕탕을 운영하는 노부부(이순재, 강부자)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따뜻하고 코믹한 이야기를 그린 가족드라마다. 나는 아버지가 장남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기에 나와 같은 대가족인 것과 노부부와 같이 사는 첫째 아들의 세 딸들 이야기가 나와 꼭 같아서 푹 빠져 봤던 기억이 난다.


"이 애가 참 참하네." 

딸 셋 중 둘째 딸인 날 보며 어른들은 조용하고 얌전하다며 칭찬하셨다. 왈가닥 언니와 야시방망이 동생은 어른들의 잔소리를 듣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실 난 얌전한 성격도 있지만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언니가 저지르는 호기심 가득한 일에 선뜻 협조하지 못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딸만 셋이라 하면 택시를 탈 때도 눈치가 보였다는 엄마의 말처럼 어린 나에게 내복을 입혀 주시던 할머니는 다리사이로 뭔가 따는 시늉을 하며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고추만 하나 달려 나오지."

세 명의 손녀를 이뻐하셨지만 그중 누구 하나도 고추를 달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셨다. 


어릴 적부터 크는 내내 생물학적 남성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내 주위에 남자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촌오빠 한 명 다였고, 남사친이란 내 사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대학 때도 소개팅은 몇 번 했어도  연애 한 번 하지 않았으니 참 그럴 만도 하다.


다들 남자를 옆구리에 낄 때 의리파인 나는 여자친구들과 우정을 쌓고 자매들과 재미나게 시간을 보내느라 허전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 시절 남자를 알았다면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졌겠지만, 벚꽃이 휘날리는 밤 순수해서 더 아름다웠던 청춘을 나의 벗들과 차곡히 채운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남자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리즈시절이니 대학가 축제나 지하철이나 가는 곳 어디서든 대시도 받았지만 그중 딱히 끌리는 사람이 없었고, 2번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기엔 누굴 믿고 연애를 해야 할지 불안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해 1월 남편을 만나서 같은 해 12월에 덜컥 결혼을 해버렸으니 늘 사야지하고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던 남자라는 것을 정작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지름신 내림으로 충동구매한 격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렇게 결혼에 골인해 나는 달랑 아들만 둘을 나았다.


그런데 말이다,

할머니가 내내 아쉬워했던 그 고추가 나를 못살게 한다.

크는 동안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던 그놈의 고추가 말이다.


한 번은 둘째가 쉬 누는데 고추가 아프다고 했다. 끝이 빨간 게 염증이 생겼나 싶 남편에게 병원 좀 데려가달라 부탁했는데 움직이질 않는다. 병원을 왜 그리 싫어하는지 사실 본인이 아파도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 않는다. 유아 때는 소아청소년과에서 고추문제도 해결했는데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니 비뇨기과에 가야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만 둘이니 요즘 잘하지 않는다는 포경수술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고 언제든 한번 터야 되는 게 정말 가기 싫은 비뇨기과 아닌가. 집 근처 병원을 찾아 첫 도전을 감행했다. 진료실에서 상태를 의사에게 설명하고 나니 둘째를 치료실로 데리고 나간다.


"휴우.."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들 홀로 치료를 잘 받고 오길 기다리는데 난데없이 다시 보호자를  찾는다.

"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라나가는데 몸이 뻣뻣해지고 얼굴에 표정이 사라진다. 문을 여니 이마에 둘러진 램프를 켜고 앉으신 의사 선생님이 보이고, 이어 세상 염려했던 그 장면이 펼쳐졌다. 둘째 고추 끝을 잡고는 상처가 사선으로 다며 나와 애 고추를 번갈아 보시며 설명하신다.


"여기 보세요."

상처를 확인시켜 주려고 주름 잡힌 고추를 잡아당기니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떠 숨은 그림 찾기를 하고 아이는 아프다고 꽥 소리친다.

"확인 안 해도 괜찮습니다."

왜 난 그 말을 미리 못 한 것이냐. 선생님은 이런 상황을 자주 겪으실 텐데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난 이미 울상이다. 간호사분이 종이컵에 빨간 용액을 넘칠 듯 한가득 따라오더니 고추 끝을 담그고 있으란다. 벌서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등에 땀이 흐른다. 집에 가고 싶다.


첫째는 왜 다리를 다치고 난리일까? 혼자 한다고는 해도 순간순간에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를 씻기러 따라오던 신랑은 자꾸 어디로 사라지고 엄마를 부르나? 플라토닉 러브를 꿈꿨던 이상과는 180도 다른 현실에서 나는 아직도 에덴동산을 뛰어다는 뱃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담들을 목격하 괴롭게 살고 있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나는 여성스럽고 차분하며 보수적이고 결혼 전까지 고추라곤 본 적이 없던 순수 그 자체 모솔인 여자란 말이다. 하늘하늘거리는 꽃들과 눈 마주치고 살랑이는 바람결에 입 맞추고 싶은 나에게 이 상황은 정말이지 고문이다. 게다가 생각해 보시라. 우리 집 젤 큰 놈의 고추가 4년 전 내 인생을 말아먹지 않았나!! 처단을 해도 모자랄 고추가 쓰리 스타도 아니고 쓰리 고추다 보니 나와 결이 같기는 틀린 듯하다.


'고추'노이로제 걸린 나인데 오늘은 이 귀한 고추를 사러 다시 마트로 향했다. 어제 마트에서 40프로 할인행사하는 양지를 구입해서 소고기 장조림을 할 참이기 때문이다. 장조림에는 꽈리고추가 생명이나 다름없기에 포기할 수가 없다.


커다란 웍에 소고기와 메추리알 각각 500그램씩 넣으니 그득하다.


진절머리 나는 고추가 간장조림에서는 빛을 발한다. 냄비에 물이 끓으면 소고기와 깨끗이 씻은 껍질채 양파, 파도 뿌리까지 넣어 30분을 끓여준다. 장조림의 키포인트는 잘게 찢은 고기다. 칼로 뚝뚝 썰어버리면 편하겠지만 귀찮아도 결대로 얇게 찢어줘야 냉장고에서 언제 꺼내먹어도 부드러운 소고기 장조림이 되기에 요리하는 남편을 거들어 같이 찢어낸다.


양지삶은 육수에 물과 양념, 메추리알을 넣어 5분을 조리다가 꽈리고추를 넣고 15분을 더 조려주 완성이다. 짜지 않은 달큼한 간장소스와 꽈리고추의 향이 입맛을 돋운다. 장조림을 끝까지 맛있게 먹으려면 꽈리고추를 아껴가며 비율을 맞춰 먹는 게 좋다.

"거 고추 참 좋아하네."

남편이 꽈리고추장조림을 먹으며 좋아하는 날 보고 농담을 던진다. 짜증을 내려다 차라리 반응을 안 하는 게 낫다는 걸 기억하 째려보고 만다.


갓 지은 밥에 버터 넣고 계란 올려 장조림 버터밥 아이들에게 주니 뚝딱 비워내고 하는 한 마디.

"이야, 오늘 간식 제대로네."

이것아, 한 그릇 더 먹고 저녁 인 셈 치고 고추는 부디 아끼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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