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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 너무할 때

#무조림

by 하루만 Dec 17. 2024

어머님이 무청이 그대로 달린 노지 무우를 3개나 보내주셨다.

"냉장고에 빨리 먹어 치워야 되는 무도 하나 있는데.. 저걸로 다 뭘 하지?"

내가 묻자 남편이 답한다.

"깍두기 담그자."

"울 엄마 보내준 것도 있고 어머님이 김장 때 보내주신 섞박지도 있잖아. 냉장고에 반찬으로 생채무침도 들어있고, 얼마 전에 소고기뭇국도 해 먹었는데 무가 들어가는 요리가 또 뭐가 있지?"


남편과 나는 정지상태로 조리대 앞에 서서 곁눈짓으로 서롤 쳐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아, 맞다!! 조림해 먹자. 고등어조림."

사실 남편이 생선조림을 먹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회는 매일같이 드실 수 있는 분인데 말이다.

"갈치조림할까?"

"여보, 갈치는 사이즈 좀 있는 거 고르면 너무 비싸. 고등어가 살점도 많고 싸지."

"그래, 그러자."

탕탕. 살다 보니 내가 속 시원히 저녁메뉴를 결정짓는 날도 있구먼. 돈 주머니가 얇아진 겨울 덕분인가 보다.


커다란 들통에서 조려지고 있는 고등어국인지 조림인지커다란 들통에서 조려지고 있는 고등어국인지 조림인지


방에서 바쁜 업무를 마치고 나가보니 남편이 그새 무를 다 잘라서 고등어조림을 끓이고 있다.

"여보, 이건 조림이 아니라 국인데?"

국이야 커다란 들통에 끓여 두고 먹는다지만 누가 조림을 저렇게 많이 한단 말인가.

"무를 많이 넣어서 그래. 더 조리면 되니까 걱정 마."

큰소리치시는 저분은 자신이 생선조림은 처음 해본다는 사실을 잊으셨나 보다. 그냥 놔두자.




바람난 남자는 누가 봐도 정신이 완전히 나가있는 너무한 상태다. 뭔가 씌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그런 상태말이다. 당연히 남편이 정신 나갔던 시절 나에게 못할 짓을 많이 했다. 본인은 다 기억하고 있을까? 나는 진심으로 이 사람 죽기 직전에라도 자기가 나에게 한 들이 모조리 모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펼쳐지게 해달라고 간간히 기도한다.


사니 못 사니 다투던 그 시절 너무했던 일들은 굳이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아직은 감정이라는 낚싯대가 기억주머니에서 쏙 하고 건져내준다. 걸려든 기억을 살펴보자면 한 번은 다투다가 격앙된 순간에 그가 내 폰을 집어던져 부순 일 따위의 것이다. 뭐 그 정도는 이성의 끈을 놓고 뾰족한 말들로 서로의 치부만 건드리는 말다툼 끝에 보이는 적당한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아쉽게도 나는 불륜드라마의 레전드 짤처럼 상간녀를 찾아가 머리채를 쥐어잡고 뺨을 후려 갈기는 너무한 일은 해보지 못했다.


요리할 도 보면 통이 커도 너무 큰 이 남자는 사실 바람도 화끈하게 폈다. 그 사건들의 나열을 나는 또한 개인적으로 기록했는데 드라마 '부부의 세계' 못지않은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그들의 숨어있는 화려한 이력을 내가 상간녀의 SNS를 통해 확인했을 때, 함께 갔던 나라들이 하이라이트로 설정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또한 상간녀는 유부남의 돈으로 누리는 모든 럭셔리를 사진으로 찍어 팔로워를 끌어들이는 중이였다. '자기관리하는 핫한 언니'의 컨셉으로 커다란 엉덩이를 들이밀며 다 보여주지 못해 안달인 몸뚱아리 사진들이 피드를 가득 채웠다.


이상하게도 그가 내게 한 직접적인 상처보다 확실한 증거였던 SNS의 흔적들이 나에겐 더 심각하게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넘어 지나친'으로 분류되는 것 같다. 그저 남편이 누군가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만 아는 것과 그 역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이미지로 확인하는 것은 엄연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웃픈 것은 그렇게 화끈했던 남자가 지금은 갈치가 비싸다는 내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는 것이다. 




"아무리 졸여도 국물이 너무 많아. 밥은 벌써 다 됐는데.."

그의 요리를 타박하는 일은 잘 없는 나인데,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하느라 에너지를 다 끌어다 쓴 탓인지 배가 심히 고프다.

"그럼 양념을 더 진하게 할까?"

"에휴, 그냥 센 불로 좀 더 조려서 국물을 떠가면서 먹어야겠다. 도대체 누구 레시피가 이런 거야?"

'헌신'이 사랑의 언어인 나는 그의 사랑을 구박하는 기분이 들어 괜히 다른 탓을 찾아본다.

"선수가 이럴 때도 있구먼."

"선수가 아니라 하수야."

웬일인지 그가 스스로 작아진다. 무엇 때문인지 나는 또 그런 모습은 보기가 싫다.


결국 더 오래 굶주린 배를 참지 못한 내가 조려진 생선과 무를 담은 그릇에 한강 같은 국물들을 마구 퍼부어 담았다.

"얘들아, 생선 살이랑 무 조금 떼서 국물이랑 같이 먹어. 그래야 맛있어."

입맛 까다로운 아이들이 불만족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 신신당부를 한다.


전자저울을 사용하는 남편이니 양념비율은 기가 막히다. 국물이 많다는 것뿐이지 맛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센스 있게 고등어가 들어가기 미리 두껍게 자른 무를 익혀서인지 익은 무의 자태가 남다르다. 숟가락의 날렵한 옆선으로 무를 동강 내주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스르륵 밀려들어가는 것이 영락없는 티라미수 케이크 안 마스카포네치즈 같다.


"하하하 그렇게 맛있어? 다들 엄청 잘 먹네."

애피타이저로 산 광어회를 혼자 먹고 있던 남편이 고개를 쳐 박고 고등어 뼈를 발라 생선살, 무, 국물과 함께 흡입하는 우리 셋을 보며 말했다. 조마조마하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그의 시그니처인 박장대소를 터뜨리면서 말이다.

"와, 이 무가 진짜 너무한데? 자기도 한번 먹어봐."

목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식감에 감탄한 내가 남편의 빠른 시식을 권한다.


감정이란 때론 참 순간적이고 변덕스럽다. 그것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하는 강렬한 동기를 제공하며 인간을 즉각적인 만족감에 빠진 욕망의 노예로 전략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눈을 봐. 눈빛이 달라졌잖아. 나 진짜 다 깨달았다고."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한다며 믿어달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다.

왜 그 길을 가보기 전에 깨닫지 못한 걸까?

그렇게 년간 남편은 충동보다는 절제하고 통제하며 신중을 기하는 법을 삶에서 배워가고 있다. 자신이 원해서라기보단 하나님이 현재 그가 처한 삶을 통해 그렇게 그를 다듬있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얼마나 재미있는 작업인가?


자신이 지키고 싶은 가치가 무엇인지
부부가 함께 구별해 가며 그 보석들을
소중한 가정과 삶에 담는 일 말이다.


오늘부터 너무하다 싶을 만큼 행복한 일들을 내가 좋아하는 티슈브레드처럼 켜켜이 쌓아보자.

죽기 전에 한 편의 영화로 돌려볼 정도로 넘치도록!


무가 너무 맛있다니까 뒷날 일식 간장 무조림을 해주심무가 너무 맛있다니까 뒷날 일식 간장 무조림을 해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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