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반지
cash flow(현금흐름)가 막히면 당장 고정비 부담이 증가되고, 생활비가 부족하게 된다. 어려운 가계를 해결할 방법으로 돈 만들 궁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아내들이 떠올리는 첫 번째 해결법은 바로 예물이 아닐까 싶다.
어릴 적 어른들께서 담소를 나누시며 하셨던 말씀을 곁에서 놀다 주워들은 적이 있다.
"나는 말이야 남편이 갑자기 실직하고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 예물 다 갖다 팔았잖아. 그래서 반지 같은 거 없어."
그분은 이 말을 하시며 자신의 왼쪽 손을 쫙 펴 보이셨다.
이미 이혼을 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던 나는
'그깟 결혼반지가 뭐라고.'
다 가져다 팔아도 하나 아까울 것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같이 회복한 우리지만, 꺼내고 싶지 않은 일들을 담아둔 깊은 내면 속에는 남편의 쓰디쓴 배신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각인돼 있다.
지나간 과거가 건네는 감정에 빠지지 말자. 당장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포털을 열어 "다이아몬드 매매"를 검색한다. 여러 군데를 클릭하며 빠르게 정보를 수집한다. 제일 가격을 잘 춰주는 업체를 찾는 게 문제지 생각보다 방법은 간단한다. 미국 GIA 감정서를 들고 찾아가면 그 자리에서 상태를 확인하고 현금으로 바꿔 받는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고 바로 내 손에 돈이 쥐어진다니! 예물테크 깔끔하다.
처음 해보는 일은 떨리기 마련이다. 집 근처에도 다이아몬드 거래소는 있었지만, 종로까지 나가기로 한다. 혼자 가도 되지만 가정을 함께 꾸리는 진정한 동반자 남편과 함께한다.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전우애가 느껴지는 듯하다.
"뒤쪽에 흠이 하나 나 있네요. 이 가격 되겠습니다. 하실 건가요?"
투명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감정사와 마주 앉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예스를 외쳤다. 받은 돈을 가방에 넣고는 뒷배경처럼 멀리 서 있던 남편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한다.
"나 서운하지는 않은데, 돈을 받으니 기분이 괜히 이상하더라."
"반지까지 팔고 서운하지 않아?"
친구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하나도 안 서운해. 오히려 속 시원한 걸."
다이아몬드 결혼반지는 원래 영원한 사랑과 약속을 상징하는 물건이지만, 나에게는 그 의미가 이미 퇴색되어 버렸다. 지켜지지 않은 사랑에 아픔을 토해내던 순간, 한때 사랑의 징표가 이제는 나를 속박하는 물건이 되어 서랍장 한 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어쩌면 반지를 파는 순간, 마음속에 묵혀놨던 어두운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것 일 수도 있다.
미처 처리하지 못하고 앙금처럼 남아있던 감정을 내버렸으니, 남편과의 관계가 더 명확하게 정리된다. "함께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힘든 살림살이 중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비록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혼반지를 팔았지만,
그 덕에 몇 년간 나를 붙들고 있던 깊은 상처도 같이 팔아버린 셈이다.
하아, 그나저나 이걸로 얼마나 버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