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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에 대처하는 40대의 자세

by 하루살이


노안(老眼)이 왔다.

내 나이 마흔 하나.

사십 대에 들어선 것을 축하라도 하듯이 깜짝 선물처럼 어느 날 갑자기 노안이 왔다.


인간이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에 물리적 심리적 에너지를 꽤 많이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평범한 사람인지라 쓸데없는 걱정을 한 보따리는 안고 살아간다. 그중 하나는 눈에 관한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안경은 점점 두꺼워졌다. 거기다 초고도 난시까지 겹쳐서 안경 없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잠에서 깨면 눈도 뜨지 않은 채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안경을 벗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안경은 그야말로 내 일부였다. 불편한 점은 말해 무엇 하리. 그러다 30대에 들어서서 큰 맘먹고 렌즈 삽입술에 도전하게 되었다. 큰 맘이나 먹어야 했던 이유는 라식이나 라섹보다 정교함이 필요한 수술이었고(작지만 실명의 위험성이 존재하는 수술이다), 무엇보다 몇 백이 넘는 비용 때문에 오랜 시간 주저했던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렇게 살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돈을 포함해 이런저런 고민으로 버린 시간이 후회될 뿐이었다. 마치 심봉사처럼 (눈뜬) 장님처럼 살다가 실제로 눈을 뜨게 된 느낌이랄까. 오직 안경을 오래 써본 사람만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안경과 한 몸이었던 과거는 수술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내 기억 속에서 그야말로 순삭 되었다.


요새 들어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업무를 보려고 앉았는데 컴퓨터 글자가 뿌옇게 보이기만 하고 잘 보이 지를 않았다. 책을 볼 때도 글자가 너무 작아 뭉개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가슴에 쿵 하고 돌덩이가 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 어떡하지? 눈에 문제가 생겼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이미 나는 다시 눈 뜬 장님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쩌면 예전보다 더 못한 더 심각한 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운 마음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부랴부랴 안과를 찾아갔다. 선생님과의 첫인사는 그동안 왜 검진을 오지 않았냐는 꾸지람이었다. 사실 매년 검사를 받아야 하지만, 안경 없는 삶에 익숙해진 탓에 정기검진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안일했던 나를 속으로 탓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하셨다.

시력도 전과 동일하고…. 눈 상태 아주 좋습니다.

읭?

아무 이상이 없다니?

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콩닥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물어보았다.

선생님 근데 책이나 컴퓨터가 잘 안 보여요. ㅠㅠ

선생님은 차트를 보시더니 “노안입니다.”라고 짧게 대답하시고는 진료를 마쳤으니 나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심장이 떨려서 며칠을 잠도 못 잤는데….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그제야 노안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셨다.


진료실을 나와 대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큰 일은 아니라는 안도감과 벌써 노안이라니 라는 충격에 마음을 추스리기가 어려웠다.


노안이라니 ….

이제 마흔 하나인데…


40대에 들어선 것을 짓궂게 환영해 주는 것처럼 받기 싫은 선물을 억지로 받은 느낌이었다. 혼자 오래 살다 보니 건강에는 꽤나 신경을 쓰며 살아왔는데, 그런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신은 내게 노안을 주셨다. 억울하기도 하고, 왜 벌써? 인가하는 의문도 들고, 수많은 감정이 교차되어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철렁 내려앉았던 마음을 다시 주섬주섬 주어내고 거부할 수 없는 나이 듦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동안은 늙고 있음(노화)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사실 이미 피부나 체력이나 모든 면에서 드러나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려서 그랬던 건지 내 마음이 나이 듦을 부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몸이 기다려주지 않고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쩌면 잔인할 정도로 공평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냥 물길에 몸을 맡기고 시간을 따라 유영을 하면 되는 것인데 애써 그 물살을 거슬러 가겠다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량해 보였을까, 신은 나에게 친히 노안으로 아는 척을 해 주신 것 같다. 소용없으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저 멀리 건물 끝에 걸려있는 산봉우리를 잠시 바라본다. 요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행동을 반복한다. 올해 나이는 마흔다섯, 노안으로 생활한 지도 4년째이다. 돋보기안경도 하나 장만했고, 자존심이 상하지만 스마트폰의 폰트 크기도 살짝 키워 놓았다. 컴퓨터 모니터도 시원시원하게 볼 수 있게끔 사이즈 업 해서 기기변경을 했다. 먼 산 보기는 이제 작은 습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늙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내가 맞춰가는 수밖에.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맞춰가니 몸도 조금씩 노안 생활자로 익숙하게 바뀌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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