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겨 듣던 라디오 채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을 떠올려 보라면,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목소리로 사연을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달콤상자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밤늦게 라디오에 귀 기울였던 사람이라면 몇 번쯤 들어봤을지도 모르겠다. 기억하기로 자정이 넘어서 시작하던 프로그램이라, 잠이 많은 나로서는 라디오를 듣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새벽에 하는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려 책을 읽기도 하고, 일기를 쓰거나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인가는 알람을 맞춰 놓고 잠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했었다. 간신히 버티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 드는 날도 가끔은 있었고 말이다.
달콤상자가 시작하는 자정이 다가오면 나는 잠깐 동안 바빠졌는데, 라디오가 워낙 잡음이 많았던 탓에 맑은 목소리를 들으려 매번 라디오와 신경전을 벌이곤 했기 때문이다. 안테나를 최대한 길게 빼서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라디오의 위치를 옮겨 보거나 이어폰을 안테나 끝에 연결하여 벽에 붙여놓기도 하고. 어떤 날인가는 방송이 끝날 때까지 새벽 내내 손으로 안테나를 잡고 있었던 기억도 난다. 내가 쓰던 라디오가 저렴한 물건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땐 온전히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었다.
그렇게 간신히 자리를 잡고 누워 달콤상자를 들으면 나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작게 속삭이는 듯한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불 꺼진 방 안에 은은하게 퍼지면, 나는 종종 설레었고 슬펐고 행복했고 우울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올라오면, 몸은 여전히 누워있는 채였지만 내 감정들은 온 방안을 부유하였다. 철모르게 정지영 아나운서를 사랑했던 때문은 아니었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 그 시간을 사랑하였다. 정지영 아나운서가 결혼을 이유로 라디오를 쉬었을 때에도, 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그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목적이 없어진 나의 새벽을 아쉬워했다.
이제 와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라디오를 들었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어쩌면 정지영 아나운서의 스위트 뮤직박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청춘의 모든 새벽을 다해 들었기 때문에, 라디오를 추억하는 것으로 내 청춘의 모든 날들이 떠올라버린 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헤집어보면 떠오르는 건 오로지 감정뿐이지만, 달콤상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는 어릴 때의 감정들이 끊임없이 밀려와 먹먹해진다.
여전히 잠이 들지 못하는 새벽이면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가 떠오른다. 한 번쯤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찾아보다가 아직도 스위트 뮤직박스가 방송한다는 걸 알았다. 더 이상 정지영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여전히 달콤상자는 누군가의 새벽을 함께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는 라디오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거의 듣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부디 오래도록 라디오가 세상에 남아 사람들과 함께하길 바란다. 비록 나에겐 오래전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누군가에겐 앞으로의 추억거리가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