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백수의 러닝 기록 (10): 오랜만에 다시 뛰는 취준생의 마음가짐
퇴사 후 꽤 오랜 시간을 백수로 지냈다. 민망하지만 그동안 뭘 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프리랜서로 일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아니고 그럴싸한 개인 프로젝트를 하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쉬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해온 한 가지가 있다면 달리기였다. "퇴사하고 요즘 달리기 해요." 이렇게 말하면 왠지 자유로운 도비이면서도 자기 관리를 하는 부지런쟁이가 된 듯한 뿌듯함이 있었다. 후덥지근한 더위와 장마, 예상 못 한 컨디션 난조, 슬슬 시작되는 구직 준비 등으로 달리는 날들이 부쩍 줄기 전까진 말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3주 만에 다시 러닝화를 신었다. 오랜만에 뛰는지라 준비 운동도 더 꼼꼼히 하고 스포츠 양말도 괜히 새것으로 신었다. 그렇게 나선 여름밤의 공원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우선 30도를 육박하는 기온에 공기가 아주 뜨끈해졌고 습기까지 가득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나의 체력이었다. 전에는 7, 8km도 기분 좋게 뛰곤 했는데 이제는 3km만 달려도 헥헥거렸다. 4km를 넘겼을 때에는 '못해 먹겠다! 그냥 멈출까?'라는 마음까지 치밀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온몸이 흠뻑 젖었다. 5km를 겨우겨우 달린 후 벤치에 쓰러지듯 누워 수증기 가득한 회색 밤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아 진짜 너무 힘들다. 5km가 원래 이렇게 힘든 거였나?'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꾸준히 하면 늘고 안 하면 퇴보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럴 것이다. 달리기도 마찬가지. 열심히 뛰던 시절의 내가 7, 8km를 잘 달려냈으니 지금도 그만큼을 뛸 것이라는 생각은 합당하지 않다. 3주라는 시간을 쉬었다면 실력도 그만큼 뒷걸음질 치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도 유지하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욕심이다. 문득 달리기란 얼마나 정직한 운동인가를 생각했다. 잠시 마음을 놓고 방심하는 순간 퇴보하는 정직한 세계. 딱 노력한 만큼만 성장하고 유지되는 냉정한 세계.
달리기에는 운이 없다(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풀코스를 완주하는 성취감을 맛보고 싶어도 그 기회는 장거리 달리기를 꾸준히 연습해온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빠른 속도로 남들을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지만 그런 영광 역시 인터벌 훈련을 착실히 한 이들만 누릴 수 있다. 러닝화 한 켤레와 맨몸으로만 하는 운동이기에 요령을 부려서 더 멀리, 빨리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5km만큼의 거리를 달리면 딱 5km의 기록이 찍히고 6분대 페이스로 달리면 딱 6분대 페이스가 찍히는 것. 눈속임 없이 내가 해낸 만큼만 기록되는 것이 달리기의 법칙이다.
살다 보면 우연한 행운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다. 요즘 다시 구직을 시작한 나의 경우는 이렇다. 매번 서류와 과제 전형은 통과하는데 마지막 면접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기운은 빠질 대로 빠졌고, 그냥 어떤 마법 같은 행운이 일어나 이런 상황을 한번에 뒤바꿔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고, 면접을 통과하지 못하고서는 최종 합격도 없다. 지난하고 고된 과정을 하나하나 착실히 거쳐야만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나는 달리기를 하며 다시금 되새긴다.
달리기도 면접도, 다시 최적의 수준에 오르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할 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둘 다 긴 휴지기가 있었으니 지금은 수준을 끌어올리는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너그러워지기로 마음먹었다(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이제부터 다시 노력의 마일리지를 쌓다 보면 결국은 나아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지금 아주 정직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7, 8km를 달려내고 면접에 통과하기까지 갈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요행과 부끄러움 없이 달리고 있다. 그렇게 밝은 면에 더 집중하면서 매일 조금씩 계속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