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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와 세리 Mar 09. 2020

#1. 봉선화를 닮았다고 하자

글쓴이, 하리

 잘 운다. 모두가 생각하는 그 울보가 나다. 울고 있어도 울 생각을 하는 게 내 머릿속 회로다. 눈물을 훔치면서 스스로도 어이없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3년 전, 대만 카스테라를 사러 갔을 때였다. 그 당시 일반 카스테라보다 스무 배는 커 보이는 대만 발 카스텔라가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톡톡 치면 탱글탱글 움직이는 카스테라 맛이 너무나 궁금했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줄이 길기도 길었다. 이제 내 차례다. 빨리 맛보고 싶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 먼저 빵을 가져간다. 직원 분이 날 잊으셨나 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눈물이 날만 한 포인트가 있나? 나는 있었을 것이다. 괜히 서러운 마음이 들어서 코끝이 빨개지고 눈물이 고인 걸 보면. 괜히 감기에 걸린 척 코를 닦았다.


 긴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잊히지 않는 울음의 순간이 있다면 11살 때쯤이었을 거다. 그 당시 나는 공룡 발자국이 유명한 바다가 가까운 마을에 살았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주인 할머니 집과 세 들어 사는 우리 집이 마주 보고 있었다. 왼쪽에는 회색 시멘트 벽돌로 쌓은 담이 있었고, 대문을 나가면 큰길로 가는 작은 골목이 이어졌다. 우리 집 문은 반복되는 네모 모양의 시트지가 붙어있는 미닫이 문이었는데, 문과 문이 겹치는 구멍에 숟가락을 쏙 넣어서 문단속을 했다. 그 집에서는 아빠, 엄마, 나 세 명이 살았던 것이 분명한데 부산으로 이사를 갈 때는 엄마와 나 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른들의 일은 잘 모른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하는 통화의 대부분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나 죄송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사라진 아빠를 찾으러 다녔다. 아마 그랬을 거다. 나는 항상 9시가 되면 잠들었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엄마가 갑자기 깨우더니 지금 어디를 좀 가야 한다고 금방 온다고 하며 나간 것이다.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11살인 내 기준에는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지나면 돌아오는 거라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한참 자다가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깼더니 새벽 3시쯤이었고, 엄마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다. 큰 방 문도 열어보고 마당에도 나가봤지만 내가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나.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하면 마음이 아플 만큼 많이도 울었다. 방바닥을 치면서 가슴을 치면서 두 발을 굴리면서 처음 겪어보는 해소되지 않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꺼이꺼이 울었다. 우는 소리에 주인 할머니가 찾아왔다. 엄마가 금방 온다고 했으니까 얼른 자라고 하셨다. 나는 그때 어른들의 금방은 기약 없는 약속의 의미라는 것을 배웠다. 


 엄마가 올 때까지 주인 할머니는 가끔 밥을 차려주기도 하셨다. 혼자 일어나서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집에 와서 또 자고 학교에 가고 그랬다. 아마 머리는 일주일에 한 번 감았을 거다. 마음이 조금 진정된 건 며칠이 지나 엄마한테 전화가 왔을 때부터다. 학교 잘 다니고 있어라, 금방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화가 오기 전까지의 며칠은 내가 감당해내기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막연함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믿어야 하는 것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가 돌아왔다. 결국 아빠는 찾지 못했다. 엄마의 어깨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 그리고 내가 있었다. 그렇기에 돌아온 엄마를 보며 보고 싶었다고, 왜 이제 왔냐고, 너무 무서웠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했다. 어리광이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착한 사람이다. 쓰러진 외할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엄마가 어리고 또 젊을 때, 학교를 가는 대신 부산 영도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며 동생들을 키웠다. 그렇다고 해서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할머니가 쓰러졌을 때 달려간 건 엄마였다. 

 이번에는 바닷가 마을에서 부산의 어느 산 아래 마을로 왔다. 동네 이름은 물만골. 일명 달동네라 불리던 동네다.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동네. 이제와 생각해보면 로맨틱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엄마는 나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자신이 아픈 것을 믿지 못했고, 엄마에게 화를 많이 내셨다. 휠체어를 사 오라고 했고, 엄마는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외할머니가 미웠다. 

 전학 가던 날, 혼자 학교를 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배정받은 반 앞에서 쭈뼛대며 기다렸다. 선생님이 오셨고, 친구들에게 첫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울었다. 울게 된 계기는 나는 샤프를 쓰고 있었는데 옆 자리 짝꿍이 우리 학교는 샤프를 쓰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왜 우냐고 물어보셨고 아프신 할머니가 너무 걱정되어서 운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 이후로 울보라고 소문이 났다. 대놓고 놀림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내게 다가오는 친구들은 없었고 나도 다가갈 만큼의 숫기가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렇게 물만골에서의 1년은 엄마도, 친구도 없던 시간이었다. 


 바닷가 마을에서의 경험 이후로 톡 하고 건드리면 눈물이 줄줄 나는 울보가 되었다. 시점은 이때인 걸 알았지만 어떤 기준에서 눈물이 나는지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모르고 있었다. 샤프를 쓰면 안 된다는 친구의 말이 서러워서 울고, 대만 카스텔라를 사러 가서 내 순서를 지나쳤다는 이유로 눈물이 났던 것처럼 사람들 기준에서 전혀 울 필요가 없는 일들에 울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행하는 행동에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굉장한 콤플렉스로 다가왔다. 항상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들키고 싶지 않고 어딘가에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었다.


 이렇게 숨기고 싶은 모습도 연애를 하면서 다 들통이 난다. 울보 인생이 집약된 것처럼 단기간에 울 일들이 생겼다. 울보라는 것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반복되는 서운함과 눈물에서 내가 언제 눈물이 나는지 패턴을 찾을 수 있었다. 상대방의 기약 없는 부재,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내가 소중한 사람이란 걸 느끼지 못할 때 이렇게 세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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