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또 독일인가 - 에필로그 1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가’ 싶을 정도의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왜 그런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996년에 선진국 그룹인 OECD에 가입을 했고, 2015년 경제규모(GDP 기준)에서 세계 11위, 그리고 2030년이면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하는 대한민국에서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선진국인가? 한 나라가 선진국인지 아닌지를 경제규모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 경제적인 면만을 본다면 그런데로 선진국의 외향을 갖추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이라고 하기엔 역부족이다. 사회, 경제, 정치,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선진국의 수준에 확실히 도달했다고 말하기가 주저된다. 아니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지난 2년여 산업체와 공무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인용했던 OECD 통계자료를 다시 끄집어 내어 보았다. 남녀 임금격차, 노인빈곤율, 10년간 자살사망율, 청소년 자살증가율, 졸업 후 NEET 상태 인구비율, 저임금노동자 비중, 여성자살률, 임시직 비율, 출산율, 아동 삶의 만족도 등등. 이 모든 항목에서 대한민국은 1등 아니면 꼴찌를 기록했다(그 사이 통계에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다).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조세 소득재분배 효과(지니계수 감소율), 국민부담율(GDP 대비 조세 및 사회보험료), 소득지니계수 등에 있어서도 거의 최하위 그룹에 속한다.
소득이 아닌 자산(금융)지니계수는 또 어떤가? 2010년 주택자산지니계수와 부동산자산지니계수는 각각 0.62와 0.70을 기록했다(고 한다). 2012년 소득지니계수는 0.357로서, 한국은 34개 OECD 국가 중에 29위를 기록했는데, 이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에서 자산보유의 불평등도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낙년이 발표한 자료(2013)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는 전체 자산의 26.0%, 상위 10%는 전체 자산의 66.4%를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하위 50%는 전체 자산의 불과 1.9%만을 가지고 있었다.
숫자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사회 내부의 민낯을 보여주는 아래의 사례들을 보자.
l (주거, 공동체, 사회) 층간소음으로 인한 살인, 아파트 경비원에 대한 갑질, 백화점/식당 종업원에 대한 반말/갑질, 쓰레기로 뒤덮힌 피서지, 공중도덕의 부재
l (교통) 홉스가 말했던 자연상태에 다름 아닌 교통질서, 교통문화, 교통사고
l (대학) 인분 먹이는 교수, 만연된 논문 표절, 학위/등록금 장사, 시간강사 처우 문제의 외면
l (정치) 정책연구 없는 정치만을 위한 정치, 여당과 야당의 대립만을 위한 대립, 사회지도층들의 온갖 탈법/축재
l (기업, 조직) 경영실패에 대한 책임 부재, 상사의 갑질, 몰상식한 회식문화, 노동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
l (노동조합)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이기주의, 비정규노동자 문제에 대한 외면, 정치/투쟁 지향의 노동운동, 경제실리주의 일변도의 노동조합정책, 조합원 자녀 채용시 가산점 주기
l (법조계, 언론계) 유전무죄-무전유죄, 전관 이용한 상상초월의 축재, 상사의 갑질에 부하직원이 자살하는 검찰조직, 엘리트끼리의 봐주기 문화, 신문과 방송의 존재/역할에 대한 회의와 의심
l (문화) 스트립쇼로 뒤덮인 TV 쇼 프로그램, 유행과 브랜드만 쫓는 저급한 문화, ‘부자 되세요’로 상징되는 물질만능 풍조
l (교육) 대학진학이 목표인 교육, 공교육의 붕괴, ‘교육’없는 교육, ‘생각’을 못하게 하는 교육, 기본적인 시민질서교육도 안시키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버트 쉴러는, 미국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 소득세율이 가장 높았고, 동시에 고성장과 고평등의 사회였다고 분석하면서, 세율을 통해 불평등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위 불평등 척도 연동 세율의 도입이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세율을 올리고, 완화되면 세율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소득재분배 정책만 펴도 우리나라의 불평등도가 이처럼 심하지 않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OECD 지니계수 감소율 통계에서 OECD 평균 감소율은 31.3%인데 반해, 한국은 8.7%에 불과했다(한국조세재정연구원, 2013). 독일의 감소율은 41.5%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세 및 이전지출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미미하다는 말이다.
1960년대에 미국의 소득세율표상 소득구간은 26개였다. 가장 높은 소득구간에 해당하는 최고 세율(평균세율이 아닌 소득구간별 한계세율을 말함)은 70%를 넘었고, 1954년의 최고 세율은 무려(!) 91%였다. 북유럽이 아니라 미국의 소득세율이다. 이것이 레이건 정권이 들어선 1981년부터 점점 줄어들어 소득구간은 6개로 줄었고, 최고 세율은 35%로 떨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슷한데, 70년대 말에는 최고 세율이 70%였다가, 전두환 정권이 집권한 1980년부터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최고 세율이 35%가 되었다. 장하성(2016)은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부의 분배실패가 오늘날 한국의 불평등을 낳은 주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제도를 끊임없이 모방해서 이 사회에 이식한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건 이제 모두 알고 있다. 기본적인 생각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만 바꾸어봐야 그야말로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 밖에 되지 않는다. 제도를 움직이는 사고, 가치관, 이런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변화없이 그 제도가 올바른 방향으로 작동하리라고 믿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우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분들이 이제 많이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고, 좋은 사회이고, 정의로운 사회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인간의 존엄성에서부터 생각의 변화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경제학자 박종현도 사회적으로 존중되는 능력의 내용을 바꾸자고 제안하는데, 같은 맥락이다. 길지만 인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어떤 결과가 특정 개인을 넘어서서 여러 사람들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집단행동의 과정 속에서 일어난 성공과 실패를 오롯이 당사자의 몫으로만 돌릴 경우, 승자에게는 과도한 칭송과 보상이 집중되는 반면, 패자에게는 지나친 비난과 부담이 전가된다. 극소수의 승자는, 자신이 시스템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의 노고와 분투와 기여에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며 세상에 화를 낸다. 다수의 패자들은, 기득권층과의 싸움을 통해 사태를 개선할 투쟁심도, 불운을 탓하며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긍정심도 키우지 못한 채, 처지가 더 열악한 약자들에게서 열패감을 해소할 배출구를 찾는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광범위한 분노와 불안의 정서는 지나친 능력주의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서는, 결과가 운에도 크게 좌우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시장에 의해 결정되는 보상의 격차에 일정한 한계를 부여하는 사전적 제약이나, 아니면 세금의 누진성을 대폭 강화하는 사후적 제약이 요구된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존중되는 ‘능력’의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집요한 이익 추구, 공격성, 무자비함 등과 같은 약탈적 능력으로부터 타인에 대한 공감과 존중,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능력, 불이익이 예상되더라도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와 같은 덕성적 능력 쪽으로 말이다”(능력주의, 해악인가 해법인가 – 한겨레 2016.7.25.).
시스템이론가인 최동석도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역시 길지만 인용한다. “…구조와 시스템을 바꿨지만, 그 구조와 시스템의 취지대로 조직이 바뀌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의 현실에서 아무리 세심한 배려를 한다 해도 조직의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는 조직구성원들의 태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관점의 근본적인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채 구조와 시스템의 변화를 꾀하는 것은 오히려 구성원들의 태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냉소적으로, 이기적으로, 때로는 파괴적으로 변한다. 경영자의 정신적 토대의 변화, 즉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 어떤 구조적, 시스템적 변화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조직의 구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은 자원 이상의 대접을 받을 수 없다. 매출이나 이익을 내는 수단으로 간주될 뿐이다(최동석, 2013, p. 24).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불신풍조와 기업의 권위주의적 조직풍토, 그리고 그에 따른 (낮은) 생산성은 결국 인간을 존중하는 경영철학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경영자와 지도자들이 어떤 지배적 관념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이데올로기화되고, 나아가 편협한 사고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되면 경영자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전도된 가치체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최동석, 2013, p. 375).
좋은 사회, 정의로운 사회에 대해서는 보충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 그리고 연대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우선 상정해 볼 수 있다(전술한 부분을 참조하기 바란다). 순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평등하나, 기능적으로는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둘의 관계를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모순관계가 아니라, 음과 양의 태극 문양처럼 서로 보완하며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꾸려가는 역설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이병남, 2014, pp. 223~228).
프랑스 대혁명의 슬로건은 “공화국의 변할 수 없는 한가지!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 그것이 아니면 죽음을!”이었다. 찰스 핸디(1994, p. 127)는 여기에 대립하는 양자를 화해시키는 삼위일체식 사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했다. 자유가 강조되면 평등은 약해지고,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는 제약된다. 이 모순적인 두 개념을 무모순의 관계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형제애(또는 박애)이다.
형제애가 있으면 자유와 평등은 모종의 조화를 이루어 공존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배려한다면 타인의 동등한 권리를 침해할 만큼 자신의 자유를 강하게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자유를 부정할 만큼 강하게 평등만을 주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도 남을 존중하고, 남도 나를 존중하는 태도. 바로 인간에 대한 존중이 없이는 공존이 가능하지 않다(정치권에서 오고가는 개헌 논의에서 이 문제 즉,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인간존중에 대한 헌법적 가치를 보다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이 다른 어떤 사안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각종 제도를, 우리사회를 재설계할 것을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