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 가능한 정도'에 대한 노와 사의 '입장 백서'

왜 또 독일인가 - 에필로그 2

by 하성식

새로운 시작은 ‘감당 가능한 정도’에 대한 노와 사의 ‘입장 백서’ 내놓기부터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폴크스바겐은 새로운 방식을 통해 대량해고의 문제를 극복했다. 그 해결방식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었으며, 또한 이데올로기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다만 새로운 모델이 노와 사가 과연 감당할만한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페터 하르츠는 “감당 가능한 정도(Zumutbarkeit)”라는 개념이 폴크스바겐이 당면한 문제 뿐만 아니라, 향후 정치사회적인 현안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감당 가능한 수준을 찾고, 이를 설득하는 것이 향후 노사관계의 핵심사항이 될 것이었다. 폴크스바겐은 새로운 근로시간모델의 도입을 통해 대량해고의 문제를 함께 극복했고, 이런 경험을 통해 노사의 잠재력을 확인하면서 다시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과연 어디까지 감당 가능한가?’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킴으로써, 노사간 상생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고, 낯설고, 또한 불편하기까지 한 것(제도, 생각)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바로 이해당사자들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대한 자문에 스스로 답하는 것이 될 것이다(Peter Hartz, 1994, p. 33).


지금 우리에게 협력적이고 평화적인 노사관계가 필요한가? 그에 대한 노와 사의 명확한 ‘입장’을 듣고 싶다. 어떤 인식, 가치, 철학에 입각해서 사는 노가, 노는 사가 필요한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함께 내놓기 바란다. 분명한 비전 제시도 함께 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그럴 역량이 없으면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를 제시해야 한다. 우선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청년실업, 고령근로자, 고용안정, 임금수준, 노동시간 등등에 있어서 명확한 입장을 설득력있게 내놓아야 한다.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라는 다소 모순되는 조어에 대해, 노와 사는 각자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양보교섭이니 뭐니 하면서 또 이데올로기를 끼워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사회의 문제에 대해 노와 사는 어디까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지(공동체를 위해 지금보다 열악한 조건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그 선을 설득력있게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스스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런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바깥을 향해 싸움이나 하려고 할 것이다. 아무런 논리도, 철학도, 방향성도 없는 채로, 싸움을 위한 싸움만을 하면서 밥그릇이나 챙기려고 하지 않겠는가.


외부의 강제력이 아닌, 스스로 입장을 정리해서 백서 형태로 밝혀 주었으면 한다. 필자는 “내가 양보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어디까지인지”를 노와 사 양 측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도 우선 정리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을 향해 노사의 ‘입장 백서’를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우리 노사관계를 개혁하는 첫 순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가진 것을 지키고, 더 가져야 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을 우리사회에 끼치는 장본인들이 될 것이다. 입으로 아무리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고, 없는 자의 아픔을 외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학수(오학수, 2013, p. 500)의 말처럼, 노동조합은 최대의 사회단체이다. 자부심과 책임의식을 갖고 자신이 속한 사회를 개혁하겠다는 신념을 품는 것이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착을 위해 필요하다.


사측도 마찬가지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없는 사람은 계속 없게 되고, 있는 사람만 더 많이 가지게 되는 자본주의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알면서도(피케티가 분석한 200년 동안의 자료를 보라!) 외면한 채, 우리 사회의 문제를 노동자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책임있는 기업의 자세가 아닐 것이다. 우리 기업이 어떻게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라왔는지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쳐다보면서, 우리들은 그 과정의 어두운 부분을 또한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 없이도 해외에 공장 짓고, 해외에서 영업을 하면 되는가? 기업의 목적이 이윤 뿐이라고 말한다면 곤란하다. 어느 한편이 강하면 균형이 깨진다. 이는 노사관계에 대해서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노사관계에 관한 것들을 정치적인 문제로 보지말고, 구체적인 삶의 문제로 인식했으면 좋겠다. 노동조합의 사회적책임(USR: Union Social Responsibility)과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이라는 근사한 말보다는, 노사가 각자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 파악하고, 감당 가능한 선에 대한 입장을 서로에게 내 놓으면서, 함께 살기위한 긴 여정을 지금 시작하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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