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변화를 고대하며

왜 또 독일인가 - 에필로그 3

by 하성식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돈을 벌고, 얼마나 성장해야 만족할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일까(로버트 스키델스키, 2013)라는 철학적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제도의 변화만 가지고는 진정한 변화(지속적이라는 의미를 포함한다)를 이룰 수 없다. 단순히 선진국의 제도를 곁눈질하고, 이제까지 해 왔던 것처럼 단순 모방만을 하자고 이 책을 쓰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변화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흔히 드는 예가 있다. 유럽의 어린 축구선수들이 기본기를 익히는데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에 우리나라 초등학교의 축구부에서는 선수들에게 골을 어떻게 넣을 것인지 전술을 먼저 가르친다고 한다. 그러니 어릴 때는 잘 하는데 성장할수록 점점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기본”이 없다. 밑천이 금방 드러나 버린다. 기본을 연마해야 할 시기에 딴 짓을 시키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입자격시험인 아비투어(Abitur)는 김나지움(학교) 교과과정만 따라가면 충분히 좋은 점수를 받기 때문에 독일에서는 따로 사교육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기본공통과목(국어, 수학, 외국어)과 3 영역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시험인데, 논술시험과 구두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의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시험구성은 다소 복잡한데, 어쨋든 시험이 단답형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논술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독일의 아비투어와 동일하다. 두 시험 모두 학생의 폭넓은 독서량과 생각의 깊이를 평가하고 있다. 모일간지 칼럼에서 바칼로레아 시험문제를 소개한 것을 봤는데, 철학적 소양을 묻는 문제들을 일별하면서 과연 우리 학생들이 이 문제를 받고 어떤 반응을 할 지 궁금했다. 아마 손을 대기도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고시시험에서도 논술형 시험을 치르기는 한다. 그러니 그 어려운 시험을 합격한 사람들은 바칼로레아 시험문제 정도는 어렵지 않게 써 내려가지 않을까? 이렇게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제한된 짧은 시간안에 상당한 분량의 답안을 써야하는 고시 논술시험은 지식과 생각의 깊이를 묻는 시험이 아니고, 얼마나 많이 외웠느냐에 관한 경연대회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우리나라의 고시 시험은 시험시간 동안 “생각”을 하면 떨어지는 시험이다. 사고의 폭이 얼마나 넓고, 유연하고, 깊은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내용을 요점 정리해서 달달달 외우는 능력 따위를 우수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만 갖췄다면, 구글링을 통해 인터넷에서 무한대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지금,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인지 모르겠다. 이 모든 것이 기본이 중요하다는 것을 망각해서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날은 저물었는데, 깊은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면, 나침반이 있든지 혹은 별을 보고 방향을 잡을 수 있는 지식이 있다면 방향을 잡고 다시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가 마치 나침반도 없고, 방향을 잡는 지식도 없는 상태와 같다고나 할까. 동네 축구하듯이 모두들 공만 쫒아가다가 우리가 지금 뭘하고 있지? 하면서 멍하니 서 있는 격이다.


동력이 없던 시절, 유일한 동력은 바람이었고, 범선은 쌍돚대를 이용해서 순풍은 물론이고, 역풍을 맞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당시의 격언에 이런 게 있다.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자에게는 어떤 바람도 이롭지 않다. 앞에 두고 추구해야 할 근사한 목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인 원칙과 비전과 전략을 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비록 역풍이 불더라도) 기본에 부합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곳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앞에 목표를 정해두고, 이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루자는 방식으로 일을 해 왔다. 잘 살아보세, 수출 100만불, 월드컵 축구 4강 달성, 고용률 70% 달성 등등.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이런 목표를 어떤 기본적인 원칙과 비전과 철학에 근거해서 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어쨋든 달성하고 보자는 식이었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이런 방식이 꽤나 유효했다. 권위로 눌러서 겉으로의 사회통합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방식이 통할리가 없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자. 앞에 내세우는 그럴듯한 목표를 설정하는 대신, 어떤 일을 하든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원칙과 비전과 철학을 만드는데 우리의 역량을 쏟아야 한다.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방식으로는 노사관계를 변화시킬 수도,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떠한 의미있는 변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고, 그 변화는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있는 어떤 가정이나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자는 그러한 기본은 반드시 인간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 존중에 바탕을 두고, 보충성의 원리(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상세히 설명했다)와 연대의 원리를 적용하여, 공동선을 위해,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양보하면서 우리의 제도와 사회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협력도 어렵고, 개선도 잘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너무 간단한 해결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간도 걸리고, 노력도 필요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과정들을 외면한다. 다윈이 말했듯이, 아마도 우리는 단 한번의 실행으로 성공하는 방법을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진화의 그 긴 과정을 상상해 보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좋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것은 만들기도 어렵지만 유지하는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고 지레 실망할 필요는 없다. 강준만이 말하듯이, 일이 되려면 또 순식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세상은 참으로 묘한 곳이다.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피곤하게 사는 한국인들의 기존 삶은 이미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거나 정점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염은 무서운 것이다. 냉소주의와 패배주의의 전염이 위력적이긴 하지만, 그 반대의 전염도 가능하다.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 전염의 무서운 가능성을 단순 산술로 평가해선 안된다”(강준만, 2013, p. 260).


미래는 단순히 과거나 현재의 추세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그런 식으로 온다면, 우리는 발달된 컴퓨터를 통해 이미 미래를 통제하고 있어야 맞다. 그렇다면 미래를 어떻게 예측하고 대비해야 하는가? 로버트 쉴러의 견해를 따르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우선 미래에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부터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현재의 추세를 가지고 미래를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미래를 그려 보려면, 미래에 통할 멋진 아이디어에 대한 우리의 감을 믿어야 한다. 지금은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좋은 아이디어라면 언제라도 시행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로버트 쉴러, 2015, p. 237).


이 책을 통해 우선 생산적인 토론을 위한 토대를 갖추고, 다음 책을 통해 일자리 창출을 위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로버트 쉴러의 말처럼,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면 언제라도 시행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대안을 내고, 그 대안을 끊임없이 가다듬어 나가려고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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