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를 시작하고 ‘고통의 역치’라는 말을 알게 됐다.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정도 강도의 운동이 충분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겨우 ‘준비운동’ 정도의 강도 밖에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운동의 숙련도나 타고남도 중요하지만 결국 정신력이 이를 지배한다.
나는 이때가 돼서야 내가 고통의 역치가 굉장히 낮다는 걸 알게 됐다. 열심히 했다고 하지만 난 조금이라도 고통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금방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실 난 예전부터 뭔가 열심히 하더라도 그 ‘열심히’가 지속되지 않거나, 혹은 그 정도는 누구나 하는 것인데 나만 특별히 그렇게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에 대해 착각을 한 것이었다.
*착각 :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함(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이런 착각은 비단 운동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기에 한 친구는 내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벌써 1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민망했던 일이라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구체적으로 밝히기 부끄럽지만, 당시의 나는 여러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누가 너 보고 열심히 한 대?”라고 내게 물었다. 당시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소릴 들어본 적도 없었고, 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때가 돼서야 내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했구나란 사실도 알게 됐다.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다.
사실 진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면 설명할 필요도 없고 설명할 이유도 없다. 열심히 사는 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열심히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렇게 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전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었기에 스스로를 너무 ‘대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고통의 역치가 낮다 보니 작은 성과에도 큰 업적을 남긴 것처럼 만족했다.
글을 쓰면서 모습만 다를 뿐 착각을 깨닫는 순간들이 몇 번이나 더 있었기에 민망함이 가시지 않는다. 착각이 무너질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 나는 도망가거나 숨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숨을 때마다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더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지만, 여전히 나에 대해 착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면 너무 숨고 싶고 부끄럽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는 게 더 괴롭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내가 또 착각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버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