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말이 있다. “젊을 땐 시간이 많지만 돈은 없고, 늙으면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다.”라는. 하지만 내 삶은 반대로 흘렀다. 젊을 땐 시간도, 돈도 없었고 지금은 돈이 없지만 시간만 남았다. 누군가는 날 아직 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법고시를 17년 했다. 붙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사람은 한 우물을 파야 성공한다는 집안 분위기로 인해 붙잡고 있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난 공부에 열정도 절실함도 없었다. 붙잡는 것만으로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그 사이 사회가 말하는 인생과 나 사이엔 거리가 생겼고, 그렇게 고시 이외에 많은 것들을 손에서 놓게 되었다. 가족, 친구, 청춘 등 남들에겐 소소하게 또 평범하게 느껴질 것들이 내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사법고시가 없어지고 로스쿨 제도가 등장했을 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는 고시를 자의로 그만둔 것이 아니라 사회 제도로 인해 그만둔 것이다’라는 일종의 안도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은 계속 흘렀고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제 40세를 넘긴 아저씨가 되었다.
솔직히 17년의 고시 생활이 강제로 마무리된 직후엔 어떻게 살아야 하나란 생각에 현실이 막막했다. 연애나 결혼은 이미 포기했고 남들 같은 사회 경험도 없었기에 평범한 삶도 포기했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했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이라면 답답해 할 1.5평짜리 고시원에서 지내면서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저렴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고시식당을 매일 1회 이상 이용할 정도의 돈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나만 고시촌을 떠나지 않는다면, 고시를 준비할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도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했던 나의 현실에 조금은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 고시공부를 하다 포기한 사람들끼리 모여 단기간 노동으로 식당 설거지, 택배 상하자 등의 소일거리 일을 하고 저녁에는 같이 무한리필 식당에서 소주 한 잔 하는 낭만 있는 삶.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나뿐이었다는 점이다. 사법고시 폐지로 마지막 사법시험이 끝나자 그 많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곳을 떠났다. 고시생 중 얼굴은 익숙해도 교류 한 번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도 그저 익숙함에 속아 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보다 어렸고, 진심으로 법조인을 꿈꾸고 있다면 고시촌을 떠나 로스쿨에 진학하는 게 당연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사실은 갈 곳이 없던 것이었다. 그런 이 현실은 나만 빼고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고시촌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생이 이런 말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형,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나도 몇 년 떨어졌으니까 내가 할 말은 아닌데, 솔직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중 형이 합격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 한 명도 없을 걸? 비참해지기 싫으면 더 늦기 전에 돈이라도 벌어.”
그렇게 혼자 꿈꾸던 낭만 있는 삶은 시작조차 못한 채 끝이 났다. 대부분 자리를 옮긴 고시생들의 현실에, 나는 도망치듯 수민동 고시촌의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고시원으로 이사를 했다. 이곳 생태계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사의 의미가 곧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다’는 신호임을 안다. 이곳 고시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 역이나 버스 정류장과 가까운 낮은 언덕엔 금수저 고시생이나 신입 고시생이 살고, 중간 언덕엔 회사를 다니며 돈을 모으는 1인 가구 사람들 그리고 높은 언덕에 사는 갈 곳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산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세상에서 점차 잊히듯 나 같은 장수생도 인적 드물고 왕래가 힘든 언덕 위로 이동하게 된다. 물리적으론 가장 높은 곳에 살지만 심정은 누구보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사람이 바로 나 같은 사람이다. 암묵적으로 나눠놓은 이 구역의 최하층민이 되었다는 사실, 이제 내 인생을 구원할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평안하게 했다. 오늘 죽든, 한 달 뒤에 죽든 어차피 똑같은 하루를 살게 될 거란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이다.
2개월 정도를 나가지도 않고 고시원에서만 지냈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보내준 돈을 어떻게든 아끼고자 고시원 밥으로 최소한의 생활만 한 거였다. 살아있다는 느낌조차 희미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이곳에서 ‘구만해’ 형을 만났다. 만해 형은 나 같은 사람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하더니 “혹시 장수생이야?”라고 물었다. 나는 고시를 포기했고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백수’라고 했다.
그러자 형은 웃으며 말했다.
“백수라고 하지 말고 ‘휴식 아티스트’라고 해. 요즘은 별거 아닌 거에 번지르르한 이름 붙여 놓고 살던데 백수라고 못할 거 뭐 있냐?”
그렇게 새로 이사한 그곳에서 나는 17년이지만 17분 같은 기억을 꺼내 형과 대화를 나눴다.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내 과거를 포장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일까. 만해 형과의 대화 후 속이 다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백수’로 지낸다는 내게 형은 자신이 일하는 식당의 주방일도 소개시켜줬다. 하는 일은 설거지였는데 마음은 편했다. 나처럼 오랜 시간 사회와 단절이 되면 잘못한 건 없지만 괜히 사람과 대면하는 일이 어색한데, 그저 일주일에 3일 출근해서 그릇만 열심히 닦으면 됐기 때문이다. 대학시절에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은 시험에 몰입한다며 부모님과 동생에게 생활비를 받아썼으니 스스로 돌아봐도 부끄러운 인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