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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라 Oct 23. 2018

우울증이 마케팅 수단으로 쓰인다고?


우울증이 마케팅 수단으로 쓰인다고?


아임낫파인 영상을 연재하던 어느 날 낯선 분이 찾아오셨다. 이 독자분은 우리가 우울증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셨다. 취재 방식에 있어 지나치게 적은 모수와 여타 한계도 지적하셨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너무 따뜻하고 인문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리가 최대한 공정하게 다양한 의견을 담기 위해 노력했음을 말씀드리며 스스로 변호했지만 그 분이 돌아가신 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전문가들은 연구를 하면 할수록 우울증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인데다, 여전히 많은 것이 밝혀지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초기에 이 프로젝트에 부정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부적절하고 부정확한 정보를 전달할까봐 겁을 먹은 나머지 차마 글을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다. 아마도 이 책이 나가고 나면 더 거센 비판이 후폭풍으로 돌아올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발견했던 우울증 문제의 빈 틈에 대해 취재를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구멍은 더 많이 찾아 읽고, 물었다. 여기에는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우울증에 대한 두가지 목소리에 대해서 담아보았다.




약을 팔기 전에 병을 먼저 팔아라



우울증이 주목을 받는 배경에는 프로작으로 대표되는 항우울제 제약회사들의 과열현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항우울제가 나오기 전까지 우울증은 기질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2세대 항우울증이 발명되면서 우울증은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전달물질의 이상에 따른 질환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제약회사 일라이 릴리는 비만으로 인한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우울증 환자들의 세로토닌이 늘어나자 우울증세가 경감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세로토닌의 농도를 높여주는 플루옥세틴을 원료로 하는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을 출시했다. 프로작은 1987년 미국 식품의약청 (FDA)에 승인되면서 널리 사용되었다. 프로작의 시대라고 할 만큼 프로작 처방은 증가하였다. 프로작이 소개된 이래로 2005년까지 미국의 우울증의 진단은 2배 증가했다. 이에 따라 우울증 진단이 너무 과다하거나 항우울자가 남용되고 있다는 시각이 생겨났다.



책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되었나>의 저자 크리스토퍼 레인은 신설된 사회불안장애들은 신경정신의학계와 제약업체가 공모하여 보편적인 감정의 영역을 시장화하고 약을 팔고 있다고 주장한다. ‘약을 팔기 전에 먼저 병을 팔아라’라는 의료계의 마케팅과 상술에 의해 사람들이 과다하게 환자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다. 프로작과 같은 2세대 항우울제가 등장하고 난 뒤 우울증 진단기준으로 활용되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DSM)’의 변화를 살펴보면 1968년 180개 이후로 112가지가 추가되었다. 이로 인해 웬만한 현대인들은 정신과에 가면 어떤 병명이라도 받아 돌아올 수 있다는 우스개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한편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이렇게 진단명이 늘어난 데는 당시 프로이트파를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방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정신의학파는 정신의 역동성 대신 뇌물질의 불균형 상태로 모든 증상을 설명하려 했다. 프로이트가 고통과 불안을 복잡한 사회 적응과정에서 비롯된다고 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따라 진단 및 항우울증의 남용을 막기 위해 정신장애의 진입조건을 더 엄격히 하자는 논의가 일기도 했다. 또 프로작 이후 1990년대 정신질환을 유행처럼 써대던 언론들도 단지 ‘집단적 기준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고 환자로 치부하는 사회’를 돌아보는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우울증 환자를 더 불편하게 만들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더욱이 한국에는 우울증의 남용보다도 여전히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우울을 방치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하지만 우울증을 생물학적 패러다임으로만 설명하려는 경향에 대해서는, 우울의 유일한 메커니즘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울증이 낭만적으로 소비되지는 않는가



최근 한국에서는 우울증 수기가 사랑받고 있다. 이로 인해 우울증이 사회적인 낙인이 아니라, 치료하고 다루어야 한다는 시각이 보편화되고,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사회적 시선에서만큼은 아주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책 <우울증에 반대한다>에서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우울증의 회고록에서는 자부심의 흔적이 자주 드러난다. 우울증을 앓은 경험이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의미다. 저자는 의사로서 우울증이 낭만성을 갖는 부분이 당혹스럽다고 밝혔다. (저자인 피터 D.크레이머는 제목과는 다르게 우울증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에게 우울증은 그저 한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잔인한 존재일 뿐이다. 우울증은 가족을 파괴하고, 직업경력을 좀먹으며 기억력과 전체 건강을 해친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미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실 밖에서는 우울증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나를 찾아온 분도 아임낫파인 프로젝트의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는 것이었으리라. 실제로 SNS에는 인터넷에 올려진 진단기준을 보고 우울증을 자가진단하고, 다른 이의 자해사진을 보며 스스로 자해를 고려중이라는 일부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있으면 분명 전염성의 문제가 우려된다. 


한편, 프리드리히 니체, 에드거 앨런 포, 생 떽쥐 베리와 같은 예술가들이 우울증을 겪었다는 사실도 곧잘 인용된다. 음악과 문학에서는 우울증이 예술의 소재로 등장한다. 최근에는 뮤지션인 빈첸의 노래가사가 자해를 정당화하거나 부추긴다는 기사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는 우울증이 낭만성과 동일시되는 경향에 우려의 목소리와 맥을 같이한다. 동시에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아임낫파인은 우울증 환자들의 입장에서 병을 인정하는 것이 괜찮다고 독려하고, 우울증은 그저 다른 질환처럼 치료해야 할 문제이며, 전문가와 주변사람에게 도움을 받자는 메시지를 주고자 노력해왔다. 앞서 소개한 두 가지 관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존엄하고 생명은 소중하다는 관점에서 우울증은 우리가 함께 안고 다뤄야 할 문제이다. 다만, 반대급부에는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음을 밝힌다. 이를 통해 우리의 메시지가 초래할수 있는 병폐를 인지하고 예방하고자 한다. 이 장의 두 가지 논점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계속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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