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 스토리 (3부. 무너지는 진규)

나르시시스트로부터 벗어나

by 보이저

-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일까?


이제 진규는 승철의 밥이 되었다.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다 모인 아침조회 시간에 진규는 여지없이 불려나갔다. 그리고 승철의 방으로 불려갔다.



"아침 도로 공사가 8시에 시작이면 10분 전에는 도착해야지, 2분 전에 도착해? 근태 불량이야"

"아버지가 아침에 몸이 편찮으셔서 돌보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근데 그 말 하면서 웃네? 나 비웃는거냐? 내 말이 우스워?"

"저 안 웃었습니다"

"웃었잖아? 이제 거짓말까지 하네? 네가 그러니까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너를 싫어하는 거야"



승철은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였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처럼 굴었다. 큰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자기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착취와 학대를 일삼았다. 진규가 대표적이다. 한 놈만 팬다고 승철은 진규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진규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승철이 나를 괴롭힌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진규는 이미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당하던 터였다. 진규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승철이가 마을에 오고 마을이 발전하고 풍요로워졌다고 그의 공덕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진규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다고 오히려 승철에게 고자질하였다.


승철은 또 군기잡기에 나셨다.



"나 억울해요! 이런 소리 지껄이고 다닌다면서?"

"누가 그러나요?"

"한 두명이 아니던데? 내가 여기 사람들 꽉 잡고 있는거 모르지?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내 귀에 들어오고 있어"

"....."

"이 마을에서 쫓겨나고 싶구나? 네 소원대로 해줄까? 기다려봐. 당장 마을회의 소집하게"



진규는 고민한다. 확 뒤집어 엎고 군청에 승철의 만행을 폭로해버릴까? 그러나 집에 몸져 누워있는 아버지가 생각난다. 이 마을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록 고등학교를 외지에서 다녔다고는 하지만 진규는 사실 외지 생활이 답답하고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돌어왔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제 좀 알겠나?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굴면 안돼! 내가 자네를 뒤에서 얼마나 챙기고 있는지는 알아?"

"...."

"사실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자네 가족들 당장 이 마을에서 나가야 한다고 난리치고 있어. 내가 그걸 막아주고 있는거라고. 그거 막는거 사실 힘들어"

"....."

"자넨 내 말 잘 들어야돼. 그래야 이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어. 그리고 고마워하는 마음 항상 잊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진규는 혼란스럽다. 승철의 말은 어디까지나 사실일까? 사실 이 모든 상황을 기획하고 연출한건 승철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까지 현혹되어 승철의 말을 믿게 되니 이제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냥 승철에게 납작 엎드리는게 최선인걸까? 내 편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승철의 말대로 승철은 진짜 나를 지켜주고 있는걸까?



- 진짜 바보가 된 진규


진규는 그 이후 정신이 조금씩 이상해지고 있었다.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뭘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던 약초 캐기와 낚시도 이제 하지 않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승철이 자기에게 한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내 인생에서 너처럼 무능하고 눈치 없는 인간은 처음이다"

"넌 할 줄 아는게 숨 쉬는거 말고는 없는 것 같아"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그 촌장이라는 인간은 멍청하니까 널 바로잡지 못했던 거야"

"넌 진짜 나 안 만났으면 어쩔뻔 했냐? 너 인생에서 나처럼 너 챙겨주는 사람 있었어?"


솔직히 승철의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결코 세뇌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항상 너무 불안하다. 밤에 잠을 자도 새벽 3시면 깬다. 꿈에서 여지없이 승철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아침 조회시간만 되면 어지럽고, 배가 아프다. 오늘도 여지없이 나를 불러 모욕하겠지... 두렵기만 하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늘 초조하고 불안하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도로 공사를 할 때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스팔트를 나무에다가 쏟아 가로수를 태워먹기도 했다. 잡초 제거 작업을 할 때는 멀쩡한 고구마줄기를 잔뜩 자르는 바람에 큰 재산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진규는 예전의 그 총명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늘 근심 걱정에 쌓여 있고 뿌옅게 안개가 낀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발 진규 좀 작업에 투입하지 말라고 아우성이었다. 같이 일하기 싫다고 승철에게 하소연하기도 하였다.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라고 했나? 한 사람을 못된 사람, 무능력한 사람으로 낙인 찍으면 그 사람은 기대에 부응하여 실제로 그렇게 되버린다고 했다. 진규에게 그 스티그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 성덕의 등장


어느 날 승철은 진규를 부른다. "또 시작이로군" 진규가 승철의 방에 들어가자, 성덕이 쇼파에 앉아 있었다.



"성덕아! 네가 진규 좀 책임져라. 얘 도저히 안되겠다. 혼자서는 자체 생존이 안되는 한심한 애야. 네가 끼고 관리해"


성덕은 진규보다도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이다. 말 없이 소처럼 묵묵히 일만 열심히 하는 걸로 알려진 은석이었다. 승철은 온갖 잡무를 은석이에게 떠 넘기고 자기 심복처럼 부리고 있었다. 성덕은 밤낮없이 일에 파묻혀서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일하고 있었다. 진규보다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인 성덕에게 맡긴다고? 진규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다.



"앞으로 진규가 사고치면 성덕이 너에게도 연대책임 물을거야. 그리고 진규가 하는 일 하나하나 네가 시간 대 별 일정 다 나한테 보고해"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앞으로 내가 실수하면 괜시리 성덕이도 피해를 보겠구나.. 진규는 한숨부터 내쉰다. 다행히 성덕은 모난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라서 진규가 흔들릴 때마다 잘 다독여주었다. 그러나 성덕은 천성이 소처럼 충성하는 성격이었다. 승철이가 지시한대로 충실하게 진규를 감시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건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었다. 승철 뿐 아니라 성덕의 감시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 뜻밖의 기회와 좌절



어느 날 승철이 진규를 불렀다. 승철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가 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내가 한 번 기회를 주지. 도로 공사를 위해 추가로 필요한 자재 총량 계산할 수 있겠어?"


진규는 내심 그 일을 하고 싶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규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당시 부기, 회계를 공부했기에 이 쪽은 자신 있었다.


"제가 맡겠습니다"

"이거 다음 주 수요일까지 다 끝내야 돼. 그때까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을거야"


혹시 못 끝내면 어쩌나 공포가 엄습했다. 꼭 저딴 식으로 말해야 하나.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진규는 현장에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밤에는 집에 돌아와 시멘트, 자갈, 몰탈, 모래 수요와 단가를 일일이 계산했다. 마침내 진규는 승철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승철은 속으로 짐짓 놀라는 눈치였다.



"흠.. 뭐 잘하기는 했네. 이거 내가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알다시피 나는 워낙 바빠서. 근데 이거 한답시고 다른 일은 하나도 안했다면서? 조경 작업 때 자네 안 왔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 그거 나한테 보고도 안하고 빠진거지"

"조경 작업 갔었습니다. 다만 반장에게 양해 구하고 조금 일찍 온 것입니다"

"나한테 보고했어? 안했어? 예, 아니오로만 대답해. 또 변명하기 바쁘시구만. 자네는 그 습관적인 변명이 문제야"

"죄송합니다. 미처 주사님께 보고를 못했습니다"

"난 다시는 자네에게 이런 비슷한 업무 안 줄거야. 이거 한답시고 다른 업무는 개판치고 있잖아"


승철의 속마음은 뻔했다. 진규는 결코 일 잘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일도 못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통제하기 편하다. 진규가 잘할 것 같은 업무에서는 제외시켜 버려야 한다. 승철은 그런 인간이었다.



- 이 마을에서 나가자!


마침내 진규는 결심한다.


"이 마을을 떠나자. 이렇게는 못 살겠다"


도저히 이렇게는 못 살겠다. 회사 안이 전쟁터면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 했지. 근데 지금은 회사 아니 마을 안이 지옥이다. 마을 밖이 지옥이라고 한들 여기보다 더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여기 있다가는 1년 안에 정신병으로 죽거나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니면 헷가닥해서 칼 들고 승철을 찌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 이상 이렇게 비참하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준비도 없이 야반도주 하듯이 갑자기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규는 1년 계획을 세운다.



"정확히 1년 뒤 이 날짜에 이 마을을 떠나는거다. 그 동안 돈도 모으고, 어디에 살지, 어떻게 돈을 벌지 계획을 세워보자!"


떠날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왜 이 마을에서 끝까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걸까? 분명히 밖에도 길이 있는데.. 물론 두렵기도 하다. 한 번에 이 마을 밖에서 자수성가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촌구석이 싫다고 샘골마을을 떠났던 사람들 몇 명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성공하지 못했다. 빈털털이가 되어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부인이 바람나서 홀아비가 된 사람도 있었다. 도회지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준비가 필요하지. 진짜 철저하게 준비해보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진규의 속에서 끓어 올랐다.



마지막 4부에서는 나르시시스트 승철이 어떻게 몰락하게 되고, 나르시시스트에 휩쓸린 샘터마을이 얼마나 황폐하게 변했는지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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