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로부터 벗어나기
풍선이 부풀다보면 언젠가는 터진다고 했던가? 사람이 잘 나가다 보면 그 성공에 도취되어 무리수를 두게 된다. 나폴레옹도 그렇고 히틀러도 그랬다. 딱 거기서 멈추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결국 인생 전체를 말아먹게 되었다.
승철은 승승장구 하고 있다. 샘골마을은 중앙정부에서 근대화 우수 마을로 선정되었다. 방송사 인터뷰도 하고 상금으로 1억원도 받을 수 있었다. 전국 여기저기에서 벤치마킹하러 샘터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행안부 장관이 샘골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건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행안부 장관은 여당 유력 차기 대통령 후보 중 하나였다. 실세 중의 실세가 샘골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승철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이 고승철이 코딱지 만한 촌동네에 언제까지 파묻혀 있을 수만은 없지. 이제 권력의 중심부로 옮길때도 됐지. 허허!"
방문 한 달 전부터 승철은 마을 사람들을 다그치기 바빴다.
"내가 잘 되야 여러분들한테도 좋은 거예요. 그러니 이번 방문 때 잘 보일 수 있게 준비 제대로 합시다! 제가 하나하나 다 볼거예요"
페인트칠부터 화장실 정비, 마을회관 청소, 환영 노래 준비, 선물로 줄 특산물 마련까지..마을은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누가 장관에게 꽃다발을 주면 좋을까? 승철은 고민에 빠진다.
명희가 어떨까? 좀 모자라기는 하지만 얼굴이 예쁜 명희였다. 사실 이 마을에 그만한 인물은 가진 젊은 여성은 없었다.
"뭐 꽃다발 건네주는 정도만 하면 되니까. 미리 훈련시키면 그 정도야 못하겠어"
행안부 장관 방문 행사는 착착 준비가 완료되고 있었다. 명희도 수십번이나 꽃다발 주는 연습을 반복했다. 승철은 다짐한다.
"내가 날아오를 기회야. 어렸을 때 혼자 방구석에서 꿈꾸던 그 순간이 바로 이 때라고"
행안부 장관이 일행과 함께 샘골마을에 도착했다. 차가 들어오기 힘든 오지 마을이라 걸어서 와야만 했던 것이다. 마을 입구에 당도하는 순간 길가에 늘어선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다.
"환영합니다. 장관님!"
승철은 90도로 장관에게 인사하고, 명희는 꽃다발을 들고 장관에게 간다. 그 때 명희가 큰 소리로 외친다.
"장관님! 저는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 서 있는 고승철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순간 시끌벅적했던 마을은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완전히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다. 한참 뒤 장관이 명희에게 물었다.
"아가씨, 그게 무슨 말이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이 사람은 하지도 않은 나쁜 짓을 꾸며내서 여러 사람을 괴롭혔습니다. 저는 비록 바보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지만, 뭐가 옳고 뭐가 나쁜지는 아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명희가 소리쳤다. 그 때 뒤에서 진규가 나섰다.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그 피해자입니다. 고승철 주사는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모두 꾸며내서 철저하게 나를 괴롭히고 착취했습니다. 제 인격은 산산히 찢겨지고 구겨졌습니다"
승철은 소리쳤다.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내가 언제 그랬어? 이 인간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장관님께 들려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뜻밖의 사람이 나타났다. 진규를 모함했던 바로 그 사람..봉수였다.
"저도 고백합니다. 이 사람들이 말한 것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저는 고승철 주사가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거짓말로 하진규씨를 모함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술렁술렁거렸다. 승철은 얼굴이 벌개져서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고 장관은 그저 입을 딱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뒤 장관은 비서에게 말한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세. 못 볼걸 봤구먼. 모범마을은 누가 선정한거야? 조만간 중앙정부에서 조사가 있을거니 시시비비는 그 때 가리기로 하겠네"
장관이 떠나자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승철은 얼음이 되어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나를 죽이겠다 이거지? 내가 순순히 그렇게 될 것 같아? 너네들 내가 가만히 안 둘거야! 이 배은망덕한 것들, 내가 거지같이 사는 인간들 개화시켜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승철은 자기가 진심으로 이 마을을 위해 일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라고 그는 환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것이었다.
일주일 뒤 중앙정부에서 조사단이 왔다. 하나둘씩 밝혀지는 승철의 만행은 상상 이상이었다.
- 정부 보조금 착복
- 주민 평가 점수 조작
- 군청 고위 간부들에게 향응 제공
- 진규에 대한 괴롭힘
- 주민들을 사적인 업무에 투입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만행은 두 건이었다.
하나는 봉수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봉수를 얼르고 달래서 돈도 주고 마을 청년위원장 자리도 주었다. 그러나 승철이 표창장도 받고 중앙정부의 주목을 받게 되자 봉수의 활용가치는 떨어지게 되었다. 진규를 사냥하는 것도 끝났으니 사냥개는 토사구팽되는 처지였다.
봉수는 그렇게 청년위원장 자리에서 밀려났다. 마음 속에 진규에 대한 미안함이 늘 있던 그였다. 게다가 승철은 그를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봉수는 이를 갈게 되었다.
"내 언제가 기회가 생기면 다 밝히고 말리라"
다른 하나는 명희에 대한 것이었다. 승철은 미혼이었다. 어릴 때 엄마에 대한 나쁜 기억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생각을 갖게 했다.
'엄마는 어린 나를 버리고 툭하면 집을 나갔지. 나는 그저 귀찮은 짐이었어. 다른 여자들도 다 마찬가지일거야. 버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버릴거야'
그런 승철에게 어리숙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예쁜 명희는 만만한 상대였다. 승철은 흑심을 품고 명희에게 접근했다.
"지난번 진규 일은 사실 나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그게 중요하지도 않고. 그래도 내가 힘쓰면 진규 일은 잘 덮을 수 있어. 나 믿을 수 있지?
명희는 자기에게 따뜻하게 잘 대해주던 진규를 잊을 수 없었다. 남녀 간의 감정 이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진규를 저렇게 비참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정신연령이 낮다는 소리를 듣는 명희였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명희는 할머니로부터 제대로 된 가치관 교육을 받은터였다.
"내가 나서야 한다. 내가 알려야 돼!"
어릴 때 읽었던 '모모'라는 책이 떠올랐다. 거지 소녀였던 모모는 자기를 따뜻하게 돌봐주던 마을 사람들을 사랑했다. 회색당이라는 시간 도둑이 마을을 장악하고 마을 사람들을 이간질 시켰을 때 모모가 나서서 이들을 무찌르고 다시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나도 모모처럼 할 수 있어. 이 마을을 위해 내가 나서야지"
이 순간의 명희는 더 이상 어수룩하고 바보같던 평소의 명희가 아니었다. 프랑스를 구했던 잔 다르크 같은 모습이었다.
승철은 그 뒤 직위해제 되었고, 며칠 뒤 사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몰락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졌다. 그가 몰락할 때 아무도 편드는 사람은 없었다. 일 잘한다고 칭찬하던 마을 사람들도 그를 욕하기 바빴다.
"우리가 속은거지. 그런 인간인줄 알았나"
그 뒤 승철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3년 뒤, 어떤 마을 사람 친척 중에 교도관이 있는데, 고승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OO교도소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말이 만일 사실이라면 승철은 여전히 그 본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뜻일 것이다. 역시나 나르시시스트는 절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진규는 마을 청년위원이 되었다. 그는 성장했다. 아픈만큼 성장한다고 자기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조언도 해주고, 그런 사람까지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년 뒤 진규는 명희와 결혼하게 되었다. 명희는 진규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명희가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진규는 정신병에 걸렸거나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승철의 가스라이팅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명희는 강인한 여인이었다. 나르시시스트를 뚫어 내는 강한 창을 가지고 있었다.
샘골마을은 쉽게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해를 받고 떠난 사람들 중에 일부는 다시 돌아왔지만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들은 더 이상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편을 갈라 싸웠던 것의 앙금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진규는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을까? 단순히 체육대회나 술자리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같이 힘을 합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올해부터 시작하는 인삼 재배 사업이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오늘도 고민에 밤을 지새운다.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승철에게 당했던 일보다야 이 문제가 어려울까? 그건 아닐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준 상처는 엄청나게 깊고 치명적입니다. 평생을 걸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게 됩니다. 상처를 억지로 지우려고 하기 보다는, 나랑 비슷한 경험을 지금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보듬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픈 만큼 더 성숙해진다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