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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스타일의 중요성 (기타의 신 지미 헨드릭스)

역사에서 배우는 일 잘하는 방법

by 보이저

기타 연주, 특히 일렉트릭 기타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전설적인 기타리스트가 있다. 그는 바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이다. 그는 기타 역사 상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추앙받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대했던 기타리스트가 누구인지 투표를 진행하면 대부분 그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다. 그만큼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타리스트였다.


기타를 잘 치는 사람들은 많다. 유튜브를 보면 초등학생 중에서도 입이 벌어지게 할 정도로 놀라운 기타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미 헨드릭스가 이 중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것은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것을 넘어, 그만의 연주 방식과 독특한 소리 표현, 심지어 전기 장치를 활용한 사운드 조절에 있다. 지미 헨드릭스 이전에는 이런 방식이 아예 없었다. 그가 다 새롭게 창조해 낸 방식들인 것이다. 현대 기타 리스 트은 그가 했던 방식을 따라 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다. 아예 자기만의 이론과 연주기법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를 언급한 이유는 제2의 인생 구상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서 그 길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다. 이미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비슷한 콘셉트를 가지고 우후죽순 솟아나고 있다. 여기에 내가 하나 추기 된다고 해서 눈에 잘 띌 리가 없다. 클립통 안에 클립 하나가 추가될 때, 그 클립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만의 세계, 나만의 영역을 창조해야 한다. 지미 헨드릭스를 소개하면서 그 방법을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 내용이 특히 글을 쓰거나 강의를 준비하시는 분들, 자영업을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지미 핸드릭스


지미 헨드릭스의 유년기


그는 불같이 강렬한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 그는 불과 2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짧은 생애동안 기타에 대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고 간 것이다.


그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흑인이었던 그는 1942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불과 17세였다. 애가 애를 낳았다는 한국식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그의 부모는 게다가 약물중독에 알코올 의존증이 심했다. 경제력이라고는 전혀 없었기에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 시절은 인종차별 자체가 여러 주에서 합법으로 취급받던 시기이다. 가난에 흑인에 대한 차별까지 겹쳐서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험난하기만 했다.


그는 14살 때 우연히 쓰레기통에서 우쿨렐레를 찾게 된다. 그걸 치면서 때로는 지푸라기로 만드는 빗자루를 들고 기타 연주 흉내를 내고는 했다. 그렇게 기타 연주 퍼포먼스를 하나씩 만들어 갔다.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16살 때 그에게 큰맘 먹고 일렉트릭 기타를 장만해 주게 된다. 그렇게 그의 기타 역사는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기타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기타만 쳐댔다. 밴드를 결성하고 하루 종일 오직 기타만 쳤다. 학교조차 거의 가지 않던 그는 결국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오직 기타만이 그의 모든 것이었을 뿐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헨드릭스


여러 밴드를 전전하며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지만, 팀에 잘 녹아들지는 못했다. 자기만의 연주 색깔이 너무 강했던 그는 팀에서는 애물단지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홀로서기를 하게 된다. 기타 하나를 들고 영국으로 떠난 것이다. 그는 본인이 중심이 된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라는 3인조 밴드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빛을 본격적으로 발하게 된다. 자기만의 선명성이 확실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는 당시에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기타를 연주해 갔다. 당시 일렉트릭 기타는 그저 전통적인 기타의 작은 소리를 키우기 위해 전기의 도움을 받는다는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당대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들은 블루스나 포크 기타를 치는 방식과 비슷하게 기타를 칠 뿐이었다.


지미 헨드릭스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기타가 낼 수 있는 온갖 소리들을 다 활용했다. 일부러 줄을 긁으며 잡음을 넣기도 했고, 줄의 가장 낮은 칸에서 가장 높은 칸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몽환적인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손가락을 바르르 떠는 기술, 줄을 잡고 순간적으로 흔드는 기법 등 그만의 독특한 연주 방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는 음향장비나 발판 등도 기가 막히게 잘 활용했다. 찢어지는 소리를 내는 퍼즈(Fuzz), 울렁거리는 소리를 만드는 유니 바이브(Uni Bibe), 왱왱 소리가 바탕에 깔리도록 기타를 치며 발로 밟는 와우 페달(Wah Pedal)등을 연주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만의 기타 연주 방식이 이렇게 창조되었다. 그가 불세출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이유이다.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해 낸 사람들


지미 핸드릭스는 그저 이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스킬을 가진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저 기타를 상당히 잘 치는 수많은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만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만의 방식을 직접 만들었다. 기존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한국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룹댄스나 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음악에 적용한 서태지가 대표적이다. 그가 92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 프로에 처음 나와서 '난 알아요'를 불렀을 때 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생전 처음 보는 음악 스타일이었다. 그가 등장한 이후 한국음악계에는 그를 따라한 수많은 댄스그룹들과 랩 그룹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게 되었다. 자기만의 음악세계를 열어젖히며 수많은 가수들을 그 세계로 초대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스포츠에도 이런 사례들이 많이 있다. 높이뛰기는 원래 모든 선수들이 다리를 가위처럼 벌려 뛰었다. 그런데 미국의 딕 포스 버리 선수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 누운 자세로 바를 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자세였다. 뭐 저렇게 뛰는 선수가 다 있냐고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되었다. 누워서 뛰는 이 방법으로 그는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게 바로 '배면 뛰기' 방식으로, 지금은 모든 선수들이 이 방법으로 높이뛰기를 한다.

(좌) 가위뛰기, (우) 배면뛰기



스키점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예전에는 모든 선수들이 두 발에 달린 스키를 11자 형태로 뻗어 하늘을 날아갔다. 그런데 1985년 스웨덴의 얀 보클레브라는 선수는 스키를 마치 V자 모양으로 만들어 하늘을 날았고, 그 방식을 통해 훨씬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었다. 그 이후 모든 선수들은 보클레브의 V자 방식으로 점프를 하고 있다.

스키점프 V자 자세




이렇게 자기만의 방식을 직접 만들어 성공적으로 개척한 사례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자기 분야를 어떻게 개척할 것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글쓰기나 강의에 있어 자기만의 스타일을 왜 만들어야만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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