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 자리를 자기 경력으로만 여기는 리더
두 번째로는 리더 자리를 그저 타이틀, 자기 경력 쌓기용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자기 이력서에 넣을 한 줄, 외부에서 강연이나 고객을 만날 때 어필할 수 있는 경력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리더에게서는 헌신이나 책임감을 찾아볼 수 없다. 그건 자기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자리를 기반으로 더 좋은 곳으로 점프해서 승진할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기에, 팀에는 아무런 애정이 없는 상태이다.
역사상으로도 이런 왕이 있었다. 그는 바로 고려의 충선왕이다.
고려는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과 40여 년 간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송나라도 못 버텼는데 조그만 고려가 몽골 상대로 얼마나 버티겠냐고 다들 바라봤지만, 고려는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웠다. 몽골이 해군력이 약한 점을 이용하여 왕실은 강화도로 피신했고, 당시 최 씨 무신정권은 열심히 싸워 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신분 상승 기회를 주며 동기부여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40년 간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국토는 유린당했고 수십만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100년 간의 무신정권이 마침표를 찍게 되면서 고려 왕실은 강화도를 떠나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신정권이 사라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충선왕의 할아버지였던 원종이었다. 그는 아들인 충렬왕을 몽골의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과 결혼시켰다. 무신정권 실세들이 함부로 왕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후부터 몽골은 철저히 고려 왕실 편이 되었고 마침내 마지막 무신정권 실세였던 임유무를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크기만 했다. 고려는 더 이상 황제 칭호를 쓸 수 없었고, 왕 이름 앞에는 몽골에 충성하겠다는 의미로 '충' 자를 써야만 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의 이름이 대표적이다. 해마다 막대한 조공과 사람을 몽골에 바쳐야만 했고, 전쟁 때는 몽골을 도와 수시로 병사들을 파병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려의 황태자들은 의무적으로 몽골 왕가의 여인과 결혼해야만 했다. 고려 왕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 혈통이 추가되면서 고려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게 고려는 점점 몽골에 복속되어 가고 있었다.
충선왕 역시 어머니가 몽골인이었던 한몽 혼혈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몽골의 제국공주로 쿠빌라이 황제가 늦은 나이에 얻은 막내딸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공주였다고 한다.
16살이었던 제국공주는 당시 40세가 넘었던 충렬왕과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왕원, 훗날의 충선왕이었다. 당시 전 세계 최강국이었던 몽골의 든든한 후원을 받는 왕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유년기는 남부러울 것 없는 탄탄대로의 연속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자주 몽골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외할아버지였던 쿠빌라이 칸을 알현하기 위해서였다. 쿠빌라이 칸은 막내딸이 낳은 외손자 왕원을 끔찍하게 아껴 자기 옆자리에 앉혀 식사를 하게 하고, 종종 잠도 같이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엄청난 후광을 얻게 되었다. 고려는 말할 것도 없고 몽골제국 내에서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략결혼이었던 만큼 아버지 충렬왕과 어머니 제국공주 사이의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23살이나 났다. 이 정도면 아버지와 딸 나이차였다. 게다가 몽골은 여자도 관직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남녀평등이 강조되는 국가였다. 성리학이 점점 국가를 장악해 가던 고려에서 제국공주가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치는 것은 고려를 무시하는 안하무인인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충렬왕은 제국공주에게 감시당하고 무시당하며 점점 정치에 뜻을 잃어갔다. 몽골에서도 아들에게 그만 왕위를 물려주고 당신은 정치에서 손 떼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그렇게 충렬왕은 반강제적으로 아들인 왕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왕원은 충선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그는 한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왕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나라에 살지 않는 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전 송나라 때 휘종이나 흠종처럼 전쟁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납치된 것도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본토를 떠나 원나라에서 지냈던 것이다.
그는 원나라에서도 최고위 서열을 지닌 사람이었다.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였기에 중요한 회의 때 상석에 앉아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 심지어 몽골제국의 황제를 정할 때 그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충선왕은 고려의 왕인지 몽골제국의 고위직 신하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것이다. 당시 고려 사람들도 이 부분을 헷갈려했다. 궁궐의 어전에는 왕이 없었다. 아무리 신하들이 충선왕에게 돌아오라고 간청해도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교지라고 종이에 지시사항 몇 마디 써서 사신을 통해 보내는 게 나랏일의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 원격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그가 내린 교지가 오고 가는 데는 무려 6개월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신하들은 참다못해 결국 칼을 빼들었다. 세자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것이다. 이 사실은 몽골에 있는 충선왕에게 전해졌고, 충선왕은 몽골 황제에게 그대로 다 일러바쳤다. 결국 세자와 그를 옹립하려던 신하들은 처형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충선왕은 귀국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충선왕은 도대체 왜 왕이 된 것일까? 왕이 그 나라에 있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살 거면 그게 과연 제대로 된 왕일까? 마치 안양시장이 안양시에는 없고 저 멀리 거제도에서 계속 지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에게 고려왕은 그저 경력일 뿐이었다. 몽골에서 살면서 "나 이런 대단한 사람이오!" 자랑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고려를 부흥시키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애초에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한몽 혼혈이다. 당연히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정체성이 약하였다. 더구나 그 당시 최강국이었던 몽골에 더 마음이 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발전된 도시인 몽골의 수도에 거주하면서 유명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이다.
그는 결국 신하들의 간청에 못 이겨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 뒤 티베트 지방으로 유배를 가기도 하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애초에 왕이 될 재목도 아니었고 체질도 아니었던 사람이 취미 삼아 왕을 한 것이다.
충선왕처럼 리더 자리를 자기 경력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경력을 가지고 더 큰 회사에 이직할 생각을 가득 차있다. 그들은 회사일에는 관심이 없다.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는 것이다.
이전에 중견기업에서 일할 때 팀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대기업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늘 전에 다니던 대기업 이야기만 했다. 그 회사는 이렇게 했는데 여기는 체계가 안 잡혀 있어서.. 늘 이런 레퍼토리였다. 사람들은 그 회사가 그렇게 좋으면 왜 여기를 다니는 걸까 궁금해했다.
수시로 그 팀장은 연차를 썼다. 느낌으로는 다른 대기업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다시 큰 회사 다니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중견기업 팀장은 어떤 의미였을까? 리더 경험 있었다는 것을 이력서에 쓰기 위해 필요했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왠지 씁쓸만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당시 팀 업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침체되어 있었기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자기 경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선거 때도 후보자들 명함을 받아보면 후보들 이력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전문강사 이력을 보면 어느 어느 대기업에서 강의했다, 이런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내용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자기 경력을 관리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잘못된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경력만을 신경 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경력이다. 그런 사람들은 좋은 평판을 얻기 때문이다. 세상이 좁다 보니 평판은 금방 그 업계에 퍼져나간다. 요즘은 레퍼런스 체크가 일반화되다 보니 더더욱 평판이 중요하다.
충선왕처럼 리더 자리가 경력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면 곤란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팀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리더 자리에 있는 동안은 열과 성의를 다하자. 그렇게 해도 잘될까 말까 한 게 리더이다. 그렇게 했을 때 진정한 경력이 생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