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 사거리

그곳에 내가 섰던 이유는...

by HASMIN

갑작스레 도진 갑갑증과 불안증 때문에 도무지 작업실에 머물 수가 없었다.

아무 약속도 없이 무작정 버스를 타고 종로 방향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내내 불안한 내 현실에 대한 생각을 트윗을 통해 한풀이하듯 날렸다. 위로받기 위함이라 해도 좋고 또, 그저 혼잣말을 주절거렸다 해도 좋겠다. 하지만, 그래야 했다.


들뢰즈의 글을 부지런히 퍼 나르는 들뢰즈 봇(@gdeleuze_bot)의 트윗 내용이 손끝을 사로잡는다.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오로지 앎이 끝나는 최전방의 지점에 도달할 때이다. 글쓰기는 앎과 무지를 가르고 또한 앎과 무지가 서로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는 그 극단의 지점에서만 시작된다.”


바로 그랬다.
글쓰기는 언제나 일상의 끝에 자리할 때 비롯되는 듯싶다. 적어도 바로 나에게는 말이다.
사랑이 끝나는 지점에서, 사랑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과 죽음이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서, 자신에 대한 성철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에서, 일상의 그 소소함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에서….


애써 잡아두었던 평온이 일순간 무너지면, 언제나 그렇듯 나를 덮치는 거대한 파도 같은 그 불안은 일면 세상이 내게 심어 놓은 고통의 씨앗 같은 것이다. 원인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 나약한 회피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스스로의 자가진단은 바로 그렇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고문과 감시를 받지 않고도 일상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허용한다. 바로 ‘빚’에 말이다. 우리는 빚에 철저히 갇혀 산다. 개인 정보를 장악당한 것은 물론이고 시간과 라이프스타일까지 모든 선택권을 내주고 있다. 빚은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빅브라더와 상당히 닮았으며 더 지능적이다. <약탈적 금융사회, 제윤경 이현욱, 브. 키>


가장으로서 정상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 생계비는 고사하고, 경기불황이라는 이름으로, 채무라는 이름으로, 고물가라는 이름으로 그 밖의 더 많은 이유 등으로 그 경제적 평온은 너무도 쉽게 깨진다. 어쩌면 그 평온은 처음부터 존재치도 않았던 자기방어기제의 작동으로 만들어진 심각한 착각이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딱히 목적지를 정한 것이 아니기에,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교보문고에 들렀다. 책 몇 권을 집어 들고는 주머니 사정을 살펴야 하는 현실에 분개했지만 어쩌랴. 눈요기나 할 요량으로 한참을 이 책 저책 뒤적이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딱히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무리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욕심껏 무엇을 가져보지도 않았다. 전에는 스스로 자유인이라 말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빚’에 매인 노예가 되었다. 아주 불편한 진실이긴 하지만 주변의 수많은 이들이 지금 그렇다.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전횡을 일삼는 거대 자본들과 그들의 비호 아래 더욱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있는 상위 1%의 부를 ‘경제정의’로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현실이다. 소위 ‘신 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는 자유스러운 자본의 이동이라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는 세계를 몇몇 사람의 아가리 앞에 제물로 바치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그 뒷모습을 온몸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01209, 세종로사거리, 휴대폰 촬영후 iPad Drawing

세종로 사거리(교보문고 앞 사거리)에 섰다.
저곳이 왜 내가 사는 현실 세상이 아니라 여겨지는지, 이곳에 왜 지금 나와 서 있는지, 그리고 이 비애 섞인 말들은 어디에 기인하는지.

그것을 나에게 묻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물어야 하는 것인지…


오늘도 '불안'은 떠보듯 나를 툭치며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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