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시계의 오용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가속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색적 삶의 상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사색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무능력이 어떤 원심력을 발생시켜, 이로부터 전반적인 조급증과 산만성이 초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의 과정이 가속화된 것도, 사색적 능력이 없어진 것도,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실종시킨 역사적 구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향기,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오늘도 무엇엔가 쫓기듯 그렇게 집을 나섰고, 땅바닥에 발도 딛지 않은 채 둥둥 떠 표류하듯 하루를 보냈다. 퇴근 즈음 긴 표류의 후유증으로 멀미와 같은 현기증이 몰려왔다. 한병철의 말대로 내 안에 똬리를 튼 채 자리하고 있는 '조급증과 산만성'이 불러왔을 병증일 터다.
버스를 기다린다.
갑작스레 여기저기서 몰려나온 사람들로 버스 안은 물론 정류장까지 만원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발 딛을 틈조차 없는 그 버스 안으로 지채 없이 달려들었고,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은 목을 길게 뺀 채 곧 도착할 버스를 기다리며 모두 왼쪽 편을 주시하며 서있다. 마치 TV 속 동물의 왕국에서 보았던 미어캣들의 사주경계 모습과 흡사한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을 풍경일 게다. 이제 여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막 도착한 그 버스에 오를 것인지 말이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유난히 얇게 입은 옷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갈지 결정을 해야 한다. 여자가 버스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 정류장은 한산해졌고, 이제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버스들에도 자리의 여유가 많다.
물건 하나가 있다.
언제나 같은 템포로 움직이는 물건으로 우리는 그것을 시계라고 부른다. 조금 전 버스 정류장으로 갑작스럽게 사람들이 모인 이유도, 다른 곳에서 왔을 버스 안의 그 많던 사람들도, 그리고 거의 모든 도시의 정류장과 버스 속 사람들도 사실, 그 시계의 알림에 따라 행동했을 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 시계라는 물건이 알려주는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그 물건은 이제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내고 있는 막강한 살아있는 권력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우고, 잠들게 하며, 한자리로 불러 모아 일하게 하고 또, 흩어지게 만든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쉬어야 한다. 늘 그렇겠지만 같은 템포로 움직이는 그 물건은 내일도 오늘처럼 사람들을 움직이게 할 것이고, 아주 일상인 모습이 되어버린 까닭에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오늘처럼 따를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약속이라고 말한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 속에는 교묘한 조작과 강요가 숨겨져 있다. 오해와 진신을 알기 위해서는 좀 더 과거로 돌아가 봐야 한다. 지금은 농경사회다. 농경사회에서는 자연의 움직임이 시간을 만들어 냈다. 계절이 그렇고 해의 뜨고 짐이 그랬다. 해가 떠서 일할 수 있을 때 일하였고, 해가져 일할 수 없을 때 일을 접었다. 이 시기의 시간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매우 유동적이었다. 여름의 해 뜨는 시각과 겨울의 해 뜨는 시각이 달랐지만 해가 있는 동안만 일을 할 수 있었으므로 실질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늘거나 줄어도 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산업화 시대가 되었다. 자연에 기대어 재화를 만들어내는 시대가 지난 것이다. 따라서 일정하게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게 되었다. 계절에 따라 늘거나 줄지도 말아야 하며, 효율적으로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준과 함께 스스로 다그칠 수 있는 자가 통제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 아니 그 용도가 재 창조된 것이 시계다. 사실 광장에 설치된 시계는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배려인 것처럼 보이나 통제를 위한 충실한 나팔수였다. 이제 시간의 기준이 마련되었으니, 기준에 적합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인 것이고 그 기준을 벗어난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은 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지키자!
이 구호 한마디에 사람들은 스스로를 언제나 일정한 그 시간의 템포에 내어 맡겼다. 그래서 아침 그 시간, 여자의 경우처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버스 안을 헤집고 올랐을 터다. 그래서 그 여자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을 것이지만,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위한 인정일까? 사실 시간은 개인적으로도 또는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 여자의 아침시간 10분은 참으로 짧았을 것이다. 어제의 피곤이 채 풀리지 않은 채 눈을 떴을 때, 10분만 더... 를 몇 번이나 외쳤을까! 반면, 그렇게 출근한 그날. 퇴근 전 10분은 참으로 긴 시간이었을 것인데, 이것을 단지 느낌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설명이 될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시계는 그것을 어찌 되었든 10분이라 말한다.
100m 달리기와 같은 스포츠, 아니 대부분 속도를 다투는 스포츠의 순위는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그 짧은 순간의 다툼을 위해 준비했을 보이지 않는 긴 시간은 간곳없이 오직 보이는 것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계의 숫자들 뿐이다. 일상의 생활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을 1,000분의 1초. 그것의 결과가 순위로 집계된다.
눈을 돌려보자.
그 잠깐의 순간을 위해 준비했을 긴 시간들 말이다. 이 시간들은 절제와 끈기로 준비됐을 인내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잘게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의미 없는 숫자가 주는 위화감에 휩싸여,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것이 핵심이다. 기준을 정하여 공표하고 그것을 쪼개어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는 것. 오랫동안 시간을 권력으로 쓰기 위한 각종 제도가 심어준 교육의 결과다.
watch
명사로 쓰일 경우 시계, 혹은 회중시계를 의미한다.
하지만 동사로 쓰일 경우 '지켜보다', '감시하다'의 의미를 갖는다.
누가 누구를 지켜보며 감시하는 것일까?
처음의 의미는 물론 사람이 시계를 들여다보는 행위에서 그 의미가 파생했겠지만, 무섭게도 이제는 그 시계가 만들어낸 시간이 우리 자신을 스스로 감시하고 채근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조건에 따른 행동의 강화가 무조건적 반응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처럼, 시간은 지켜야 한다는 조건의 사회적 답습이 결국 무조건적 추종과 자기 검열로 이어져 조급증 환자를 양산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내일 아침은 적어도 시계가 주는 차가운 리듬에 따른 숨가쁜 시간이 아니라, 나를 위해 더디게도 혹은 빠르게도 흐를 수 있는 주체적 시간이 여자에게도 있었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