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SMIN Jan 09. 2020

욕구불만

과거 어느 때, ‘실패’라 여겼던 것을 통해 현재를 돌아본다.

오늘 나의 행적은 마치 주변을 정리하려는 사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복잡하고 힘에 겨웠지만, 한편으론 편안해지는 느낌까지 들었다. 아무 계획 없이 사무실을 나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커피를 마시며 물끄러미 앉았다가 부모님을 뵙고 싶어 근 2시간을 버스로 돌아 부모님 댁에 다녀오기까지 나도 모르는 내가 나의 신변을 정리하려는 듯하였다. 사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를 했는지 모른다. 물론 나약한 존재라고, 인생과 사회에서 패배한 패배자라고 여길 다른 눈이 두려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을 몇 번이고 고쳐먹었던 터다. 이런 정도면 틀림없이 우울증인 듯한데… 이젠  이러한 상황이 익숙하기까지 하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또 잘 넘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인내와, 신앙이 힘이었다면, 이번에도 잘 넘길 것인지… 글쎄… 다.


마침 오고 가는 길은 빗줄기가 간간히 뿌리는 그런 날이었다.

짧은 거리의 노선을 놔두고 가능하면 멀리 돌아가는 길.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내게는 잉여시간이 주어졌다.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생각들이 돌고 돌아 과거로까지 이어져 어린 시절 나와 대면하였다. 어린 시절 내 모습은 온순한 듯 하지만, 드러내지 않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런 아이였다. 그간의 인생 여정을 과거에 투사하니 그것이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늘 욕구불만에 휩사여 살았지 싶었다. 물론 교묘하게 그것을 숨기고 마치 아닌 척, 그것을 초월 한 척하며 그 후로도 오랫동안 시간을 잘 보냈었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 말이다. 그래도 스스로를 추슬러 보려고 적었던 글들은 원망과 분노, 회피와 스스로에 대한 질책 그리고 그것을 애써 초월한 척 스스로를 더욱더 교묘하게 감추는 사기극의 연속이었다.


몇 해전부터 원치 않게 내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주어졌다.

그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그 시간이 여유라는 이름으로 내게 와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또, 그렇게 주어진 시간을 ‘대범’하게 미래를 위해 준비의 시간으로 여기면 되지…. 여겼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지만 현실의 나는 소심하기 그지없었고 조급하기 까지 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동안 욕구불만으로 강건하게 다져진 비관적 태도의 소유자였으므로 숨겨두었던 본성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점차 다른 이들에게 들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고는 그것을 못 견뎌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눈물겨운 신파를 쓰고 있는 터다. 생각 같아선 부모님 댁에서 하루 자고 오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까지는 하지 못하고 차려주신 저녁을 먹고 잠시 더 앉았다 돌아서 나왔다. 노인 두 분만 계신지라 벌써 저녁을 드시고 자리에 드신 터였다. 어머니께서 급하게 내어 주신 저녁을 허겁지겁 해치우고 물 한잔을 더 마신 후에야 허기가 가셨다. 마흔 중반을 훌쩍 넘긴 자식에 대한 노모의 걱정도 함께 넘긴 터라 쉬 허기가 가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엔 거의 저녁 한 끼로 하루를 보내왔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있다면, 그저 허망한 오기라고 할까. 아무튼 그렇게 주린 배를 하고도 늦은 밤 집에 들어가서는 먹고 들어왔노라 말하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의 에너지로 그 상황을 활용하곤 하였었다.


좀 더 솔직해진다면, 벌써 오랜 시간을 아내와 말 없는 동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생각도 나질 않는다.

처음 시작은 그렇게 막연하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막연한 상태가 아니다. 아비로서의 의무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도 그저 지기 싫고 무거운 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 여기는 정도의 비루한 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띄어가고 있는 터다. 이런 차림새가 더 갈 수도 있겠다 싶어 지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하루 일과는 대충 이렇다.

늦은 밤 집에 들어가면, “저녁 드셨어요?”라는 한마디에 “네, 혹은 아니요”로 답을 한다.

그러고는 나는 안방으로 아내는 작은 녀석의 방으로….

아침이다.

씻는 등 마는 등… 집 앞에 있는 작업실로 괭한 눈을 하고 나와 하루를 빈둥댄다.


싫다.

그저 나 혼자만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두고 가끔 내킬 때만 잠시 나왔다가 다시 숨어버리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싫다.

예술혼이 살아 숨 쉰다면, 이러한 상황을 승화시켜 예술적 결실이라도 맺어 보겠지만 그도 아니니 짖게 농축되어 가고 있는 이 욕구불만이 그 한계를 향해 초침을 날리고 있다 할 밖에.

이미 이러한 처지에 든 지 오래되었으니 언젠가 그 끝이 오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언젠가 “이만하면, 잘 살았다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적었던 글을 보며, 섬뜩한 내 모습에 놀랐었는데…


그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 무엇이겠는가?

지금도 나는 나를 지킬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너저분한 좌판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하여 훈훈한 마무리였으면 싶다.

자본의 신이 약속한 ‘성공’이라는 구원의 징표 뒤에 숨겨 놓은 ‘불안’이라는 자기 검열적 메커니즘에서 오는 부작용이라 통 크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놓고 스스로 벌이는 이 논란이 현실과 충돌해 쏟아 내는 부스러기와 잔해들이 더 이상 나를 향한 흉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 나름의 실패를 겪으며 스스로의 연민에 빠져 적었던 글을 다시 들추어 본다.

지금의 상황을 당시와 비교해 보면 현재가 훨씬 더 어렵고 엄중하다. 당시의 그 복잡했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언제 그랬나 싶게 지나갔던 것처럼 현재의 상황도 그렇게 지나기를 소망해 본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모양이다. 아니, 경험을 통해서 현실에 대해 더 무감해졌을 수도 있을 터지만 조금 더 단단해진 것은 사실인 듯싶다.

그래도 다행이지 싶은 것은 이러한 글쓰기가 나름의 욕구불만을 충족할 만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이러한 행위도 그것과 다름 아닐 터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의 의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