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세계』_ 04. '중세'까지만...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었어요. 지울까 넣을까 하던 문구가 계속 안 들어가길래 넣지 말라는 계시인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맨 위로 복사 되고 있었더라고요... 이 위치에 있던 요상한 문구를 목격하신 분들은 부디 잊어 주세요;;
0. opening
소피처럼 욕심이 앞섰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챕터씩 봐서 어떻게 열두 번 안에 이걸 다 끝내나 싶은 마음에 '르네상스'까지 읽자 했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중세' 챕터까지만 함께 살펴 봐야 할 것 같아요. 지난 시간에 못다한 이야기도 있고, 천 년은 너무 길기도 하니까요. 아마 이마저도 절반밖에 못하지 싶어요.
르네상스를 맞이한 근대 유럽인들에 의해 '암흑기'로 규정되기도 했지만, 서로마가 멸망한 5세기 후반부터 14세기 말까지의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 신비롭고 낭만적인 상상력으로 추억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고향이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우리의 중세 이야기도 많이 발굴되고 재생산되어 더 대중적인 동화로 자리잡으면 좋겠어요. 그럼 언젠가 다양한 기와지붕이나 구불구불한 담을 따라 이어지는 골목, 산성, 장터로 가득 찬 놀이동산도 생기겠죠? 그저 민속 체험 같은 것에 머무는 테마파크 말고, 이야기가 지닌 설렘과 낭만을 자극하는 놀이동산이요. 웹툰 작가님들 부탁합니다. 디즈니랑 손도 잡았다면서요.
1. 새로운 패자, 로마
알렉산더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죽고 광할한 제국 마케도니아는 분열됩니다. 그리고, 곧 망하죠. 중앙집권을 위한 각종 역량(이동수단, 통신 기술, 제도 및 문화 등)이 미흡했던 시기의 대제국은 자치 관료를 배치하는 식으로 넓은 영토를 지배했기 때문에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면 각지의 자치권력에 의해 분열되기 쉬웠습니다. 그건 그 시절의 조건을 생각하면 어쩌면 자연스럽기까지 한 일입니다.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은 이제 많이 극복되었어요. 현대의 국민국가들은 대부분 건강한 지방 자치를 지향하면서도 중앙의 집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기술적, 제도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단단한지 주기적으로 혹은 수시로 권력자를 갈아 치워도 끄떡없을 정도이지요. 소통과 정치에 따르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고대에 비하면 없다고 해도 될 만큼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마케도니아 제국이 끝내 망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들이 공통적으로 정복민 친화 정책을 썼다는 것을 배운적이 있습니다. 몽골도, 오스만도 피정복민에게 자신들의 문화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그것이 정복지의 반발을 줄여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요. 알렉산더도 그랬습니다. 정복지의 문화를 인정하는 '융화 정책'을 썼죠. 덕분에 헬레니즘도 형성될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지에서의 계층 차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알렉산더는 그리스나 마케도니아 출신 장군이나 관료를 배치해 정복지를 통치했는데요, 임명된 그들은 정복자인 만큼 점령지의 권력과 행정권을 독점하며 자연스레 그 지역의 귀족이 됩니다. 그 지역의 토착민이었던 다수의 피정복민은 하층민이 되는 것이고요. 일제강점기의 조선을 떠올리면 쉽습니다.
문제는 헬레니즘의 융성과 함께 제국의 경제는 점점 성장하는데 피정복민의 가난은 갈수록 심화되었다는 점이에요. 말하자면 빈부격차가 극심해진 것입니다. 백성이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지배자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겠죠. 사회 통합에 실패한 나라는 분열과 권력 투쟁으로 국력이 헐거워질 수밖에 없잖아요? 바로 그때쯤 서쪽에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처럼, 로마가 침공해 들어옵니다.
그런데 로마도 마케도니아가 이민족에게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제국을 통치합니다.(제국주의의 한계인 것 같아요.) 이념적으로는 스토아철학(스토아철학은 로마의 법치주의와 공공 윤리의 기초가 됩니다.)이 표방했던 보편적 질서를 토대로 한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실제 운영은 이민족 차별 정책을 썼던 것이죠. 그러니 피정복민들은 또다시 절대강자 로마에게서 벗어날 날을 간절히 원할 수밖에요.
특히 이미 너무 오랫동안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 왔던 유대인들이 간절히 기다립니다. 그들의 특수한 역사관에 따르면 신이 (율법 불순종, 민족 분열 등에 대한) 벌을 충분히 주셨으니 이제 새로운 왕을 보내어 구원해 주실 때가 됐거든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은 약소민족이었던 유대인들에겐 고단한 운명을 납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논거들이었어요.
그렇다보니 로마가 강성해질수록 점점 그 기다림이 간절해지고, 간절해지다가, 급기야 곳곳에서 예언에 나오는 메시아(히브리어 : 메시아 혹은 마쉬아흐, 고대 그리스어 : 크리스토스 혹은 그리스도, 영어 : 크라이스트, 한국식 한자 음독 : 기독)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나야. 아냐, 나야. 아니 글쎄 나래두? 이런 식으로요. 얼마나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요가 컸던 만큼 복수로 등장했던 것 같아요.
(메시아는 신적 권위와 사명을 부여받은 자를 가리키는 유대민족 고유의 명칭입니다.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머리가 떡졌다는 뜻은 아니고 고대 유대 왕국에서는 왕, 제사장, 예언자 등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머리에 기름, 즉 향유香油를 부었다고 합니다. 향유는 거룩함, 치유, 헌신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2. 예수와 바울
그런데 그중 유독 유대 지도자들을 짜증나게 하는 이가 하나 있었어요. 거의 거지꼴을 한 듣보잡이 "율법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불경스러운 선언과 함께, 이웃을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느니, 약한 사람을 도우라느니 하는 답답한 소리를 하고 다니고 있었거든요. 더 심각한 건 그가 여자나 병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따지고 보면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는 대다수가 핍박받는 약자였던 셈이니 그 인기는 그냥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침입자에 맞서 유대민족을 하드캐리 했던 다윗 같은 메시아를 기대했던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허약한 소리나 하는 이가 메시아를 참칭하는 것이 불쾌합니다. 그런데 결국 그 유명한 오병이어(다섯 개의 떡과 물고기 두 마리로 만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후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하죠. 대체 그는 누구였을까요?
네. 그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나사렛 예수(히브리 어 : 여호수아-야훼의 구원)입니다.
당시 예수가 등장한 나사렛, 넓게 보자면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처럼 유대교 중심의 질서가 강한 곳은 아니었어요. 그렇다고 로마의 주류 철학인 스토아 철학이 상식으로 자리잡은 곳도 아니었죠. (유대 중심지에서도 외곽에 속하는 곳이고 로마 또한 본토에서 많이 떨어진 지역은 자신들이 임명한 왕을 세우는 정도로만 영향력을 행사했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헬레니즘의 세계시민주의 정도는 퍼져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배경 덕에 유대인 중심의 폐쇄적인 선민의식보다 예수가 말하는 보편적 죄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져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했던 어려운 실천들보다는 믿음과 기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더 마음이 가기도 했을 거고요. 예수의 인기는 그의 행보를 따라 갈릴리 너머의 지역으로 확장됩니다.
그걸 유대의 지도자들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겠죠. 예수의 행보는 자신들이 지켜오던 믿음의 질서와 권위를 뒤흔들 뿐만 아니라, 그 권위에 기반한 자신들의 기득권마저 위협하는 도전이었으니까요.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걸었다가 사형이 불가하자 다시금 정치적 반역자로 고발하고 그래도 무죄를 선고 받자 총독 빌라도의 정치적 약점(왕을 참칭한 자를 용인한다는 건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겠다는 거지?)을 걸어 집요하게 예수의 사형을 종용합니다.
결국 예수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방식으로 처형되죠.
그런데 얼마 후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진, 그나마 유대 정복민 중에서는 살만한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정통 율법 교육을 받고 자란 유대 귀족이었던 셈이죠. 그런 그가 예수의 소문을 곱게 들었을 리가 없죠. 그는 벼르고 벼르다 대제사장의 권위를 얻자마자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떠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길 위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 회심悔心하게 된 것이죠. (이 회심 스토리는 워낙 신앙의 영역이라 자세한 얘기는 생략합니다.) 그 유명한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이후 그는 로마 곳곳을 돌아다니며 예수의 사상을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합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자들과 대립하기도 하는데, 바울은 헬라 철학의 언어와 개념을 빌려 그 깐깐이들을 설득해 냅니다. 로고스를 예수의 신성에 연결하기도 하고,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말을 인용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는 식으로요. 헬라 철학의 중심지 중 하나인 다소(Tarsus) 출신인 만큼 당시 헬레니즘에 유행하던 다양한 헬라 철학에도 정통했던 것 같아요. 물론 율법에도 밝아 유대 율법주의자들과의 토론에서도 밀리지 않았죠. 바울은 당시 세계에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던 겁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이 유대인이 중시했던 혈통이나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라도 예수를 믿으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가 유대 민족의 범주를 넘어 수용될 수 있는 유연한 근거를 마련한 것과 동시에 기독교를 '보편적' 진리의 반석 위에 올린 것이죠. 정통 율법학자 집안 출신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사상은 굉장히 개혁적인 것이었어요. 그 개혁으로 일어선 수많은 교회 덕분에 유대인의 일개 종파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이후 천 년 간 유럽의 지배적 문화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3. 기독교 기반의 중세 시작, 그리고 철학의 기독교적 수용
그러나 기독교는 시작부터 엄청나게 박해 받습니다. 예수의 등장 때부터 박해의 선두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특히 더 엄청 박해를 받는데요, 서기 2세기 경 등장한 아주 센 계기가 있었어요. 그 계기는 바로 "시몬 벤 코스바Shimon ben Kosiba(혹은 바르 코크바Bar Kokhba. '별의 아들'이라는 뜻)"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다윗형 메시아'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자(그 역시 메시아를 자처했습니다.) 로마에 맞서 유대인의 독립을 기도한 바르 코크바 반란Bar Kokhba Revolt의 지도자였어요.
다윗의 재림으로 추앙 받으며 유대의 지도자가 된 바르 코크바는 로마에 맞서는 전쟁을 벌였던 만큼 유대의 강력한 결속과 단결을 추진했는데,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섬기는 기독교인들은 비협조적이었어요. 결국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바르 코크바의 명령으로 고문당하거나 처형당하기까지 합니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사실 상 유대인 사회에서 퇴출 된 것인데요 코크바의 반란 실패 후 로마의 철저한 유대교 박해 과정에서 로마에 의해 비유대 종교로 구분 되면서 외부적으로도 기독교는 유대교와 분리되어 인식됩니다. 바르 코크바의 반란을 계기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완전히 갈라서게 된 것이죠.
덕분에 기독교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유대 지도자들의 탄압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로마의 박해는 기독교의 기본 사양이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다신교 신앙을 거스를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받아 신격화한 황제마저 숭배하길 거부하고 자신들의 유일신(하나님)만 믿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힘도 미약하기 짝이 없으니(신도의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 박해 받기 딱 좋았죠. 네로 황제의 대화재 책임 전가(일제의 관동대학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부터 혹독했던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마치 바통 터치하듯 황제를 바꿔 가며 약 300여년 간 이어집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 의지에 힘입어 마침내 박해에서 벗어나고 (313년 밀라노 칙령) 4세기 후반엔 로마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죠(380년 테살로니카 칙령). 소피의 세계에서 나오는 오전 네 시. 마침내 기독교가 유럽 역사의 주연으로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로마는 오히려 다신교 제사와 관습은 금지되고 기독교만이 정통 신앙으로 인정되는 변화를 겪습니다. 국교로 지정한 만큼 교리 통합에 황제가 직접 개입하기도 하죠(니케아 공의회). 예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로마의 태양절이었던 12월 25일로 정해진 것도 이 때쯤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박해에서 벗어나자 자유를 얻은 기독교는 핍박 대신 도전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요. 로마로 이어진 헬레니즘 문화 자체가 오랜 그리스 철학의 전통 위에 세워진 문화 아니겠습니까. 특히 국교로 공인 되기 전, 그러니까 밀라노 칙령 등으로 이어진 개혁들이 마뜩치 않았던 자부심 강한 로마의 귀족들 혹은 지식인들은 기독교 교리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죠. 황제와 결탁하여 교회 권력이 점점 커지는 것도 꼴보기 싫은 이들에게 창조주나 부활 같은 이야기는 비합리적인 미신이라며 공격하기 좋은 먹잇감이었어요.
분열하는 로마를 통합하고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동체성이 강한 기독교를 지지했던 황제들은 적잖이 난감했을 텐데요, 이때 기독교의 구원 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지난 시간에 신플라톤주의와 기독교가 경쟁했었다는 얘기를 살짝 했었죠? 실제로 신플라톤주의는 황제를 등에 업고 점점 세를 넓혀가는 기독교의 대항마 역할을 했어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기독교 신학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이어갔죠. 이 끝이 안 보일 것 같은 싸움을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정한 것입니다.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안으로 흡수해 버리는 방식으로요.
그게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아우구스티누스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기독교가 아닌 마니교로 시작되었는데 선악의 근원을 고민하다 생긴 진리에 대한 불신을 기독교를 통해 극복해요. 하지만 이후 키케로의 저작을 통해 스토아 철학에 감명을 받아 기독교적 정의와 국가 개념을 연결해 정립(정치 권력과 신앙을 결합한 것이죠)하기도 하는 등 철학 연구에 심취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사상을 종합하고 수용해 온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역시 기독교와 전혀 배치될 게 없다고 선언하고 오히려 이데아 이론을 이용해 기독교의 내세관이자 구원론의 핵심, 천국의 세계를 설명해 내죠. (너네가 말하는 이데아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란다.) 플로티노스의 일자 개념과 영혼을 비롯한 존재의 위계 등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해 내고요. 불교와 도교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오히려 유학의 철학적 토대를 강화한 동양의 주희처럼요.
그렇게 아우구스티누스가 종교철학(또는 신학)의 체계를 마련하면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는 중세 천 년의 철학이 시작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기독교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사람들을 교부敎父라고 높여 불렀다고 하는데요(그래서 이 교부들이 이어간 2~8세기 사이의 종교 철학을 그래서 교부철학이라 합니다.), 로마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이 교부들에 의해 정립된 단단한 철학과 그에 기반한 공동체(교회) 운영 방침이 있었기에 로마의 붕괴 후에도 기독교는 살아남습니다.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행정, 법률, 교육 체계는 로마가 무너진 혼란기에 사회 질서의 축으로 기능하며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죠. (로마에게 늘 차별만 받던 게르만 족 등의 이민족들에게 기독교의 보편적 윤리와 통합된 공동체 의식은 꽤나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업적이 사도 바울의 그것에 비견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슬람을 통해 다시 만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다시 한 번 도전을 받습니다. 지난 번 추천해 드렸던 『번역은 반역인가』를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헬레니즘 시대는 인문학이나 철학보다도 자연과학이나 수학 같은 이과 계열 학문들이 더 발전한 시기였는데요, 알렉산더가 정복지에서 수집해 보내는 온갖 자료를 연구해 학문으로 체계화 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이 지대했죠. 그 성과가 이집트에 건설한 알렉산드리아의 거대한 도서관에 모여 있었는데, 후에 알렉산드리아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면서 그 업적이 모두 이슬람에 넘어갑니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을 통해 그것들이 다시 기독교 문명에 돌아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다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플라톤 철학을 흡수하며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 식의 종교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식 비판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를 못 읽게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을 갖거나 그와 결부하여 신학을 연구하는 것을 금지해요(교수들에게만 비공개를 전제로 허용).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기독교적으로 수용된 이후에도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수도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부 저서를 금지합니다. 그런 경직된 수도원 문화를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장미의 이름>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죠. (202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8부작 드라마로 만들어 kbs에서 방영도 했다고 하는데 그건 못 봤어요 ㅠㅠ)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이 유럽에 불러 온 거대한 변화를 막을 수 없었죠. 영화에서도 사망 사건을 조사하러 온 수도사(불교식으로 말하면 수도승?) 숀 코너리가 거의 첫 장면에서 삼각자 같은 도구들을 꺼내는 모습이 나오는데요, 그것이 이미 수도사 사이에서도 자연과학적인 관심과 사고방식이 퍼져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장미의 이름>은 망조가 들어가는 중세 기독교 권력의 한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한 것인데, 이 시기를 지나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독교 안에서 훌륭하게 소화해 낸 또 다른 구원투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래야 중세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데, 되는데에... 분량 조절 실패로 또 다음 주로 넘겨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4. 다음 주 진도 및 subtext 소개
다음 주엔 이번 주에 못다한 중세 이야기를 마무리 할게요. 중세가 어째서 그렇게 천천히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와 스콜라 철학에 대해 얘기한 뒤, 드디어 근대 문명의 시작-르네상스에 대해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소개해 드릴 subtext도 여러 모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사회상이 잘 묘사된 작품으로 (배경음악으로 퀸의 노래가 나오긴 하지만) 골랐습니다. 지난 시간에 약속한 대로 매우 가벼운 걸로 준비했어요. 바로 히스레저 주연의 <기사 윌리엄>(2001)입니다.
<장미의 이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장르 영화랍니다. 우리의 maintext 『소피의 세계』는 르네상스 챕터까지 복습해 오기로 해요.
오늘도 긴 글 끝까지 함께 읽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