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소피의 세계』_ 05. '르네상스'

by 하소초


0. 우리는 고작 우리가 속한 시대에만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르네상스' 챕터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인데요, 어쩌면 저 문장 때문에 이렇게 긴 독후감을 쓰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함께 읽은 부분(중세~르네상스)에서 유독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심연'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저는 저 문장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심연'을 가까스로 인정할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덕에, 철없고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맞닥뜨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분노하고 좌절했던 차이들도 끝내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라는 압도적인 권력이 무너지고 뿔뿔이 분열된 힘들이 각자의 역사를 품고 봉기하여 막연한 위협으로 상존하던 시대의 지혜 또한, 그 수많은 차이와 그로 인한 긴장을 하찮게 여기게 할 만한 '보편 타당'을 갈망했던 것 같아요. 그것이 중세의 역설인 것 같기도 하고요.


요동치는 중세.jpg 출처 : Pixabay


신학이라는 새로운 철학의 등장을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감히 여러분도 그렇게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제 짧은 생각은 그렇다는 얘깁니다.) 각기 다른 역사를 유연하게 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공존의 모색이 남긴 유산이라고요. 그래서 '중세'와 '르네상스(탈중세라고도 볼 수 있겠어요.)' 단락을 되짚으면서는 유독 역사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생각의 배경을 함께 짚어두지 않으면 잘 기억이 안 날 것 같아서 제 나름으로 마련한 궁여지책이기도 해요. 앞으론 좀 덜 할테니 오늘까지만 참아주세요. ㅠㅠ



1. 요동치는 중세

중세 철학자들의 철학적 구상은 '기독교의 계시를 무조건 믿을 것인가. 혹은 이성적 사유로 기독교적 진리에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구상이 구체화되면서 '그리스 철학과 성서(성경)의 관계, 성서와 이성 사이의 모순 여부, 믿음과 인식의 일치 여부 등'이 중세 철학의 주요 주제가 되었고요. 지난 주엔 플라톤을 흡수하여 교부 철학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그 첫번째 양상을 살펴봤었죠.


토마스 아퀴나스.png 토마스 아퀴나스_출처 :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


그리고 오늘은 그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작한 신학을 한 발 더 나아가게 한 남자를 만나볼 차례입니다. 그는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한 손엔 칼, 한 손엔 쿠란."이란 말을 한 사람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 잘못 알려진 거래요(명확한 근거가 없답니다). 하지만 그가 살던 시기의 유럽에서 유행했던 말이긴 했던 것 같아요.


이 말엔 이슬람 문명을 편협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당시 유럽인들의 시각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는데요, 그럴 만도 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이슬람에 대한 감정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아퀴나스가 태어나 살던 유럽은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막바지에 달한 시기였어요. 그리고 솔직히, 많은 전쟁에서 유럽이 이슬람에 밀렸죠. 전성기의 이슬람 문명은 정말 대단했으니까요.


이슬람 세력의 확장.png 이슬람 세력의 확장_출처 : 수각류일기(티스토리)


7세기 경 발생한 이슬람교, 이슬람 문명은 무함마드(Muhammad,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는 서구 중심적인 왜곡이므로 지금은 권장되지 않는 표현.)의 사후엔 로마 부럽지 않은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특히 튀르크족(현재 터키인의 조상)이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엔 사실상 이슬람이 지중해를 재패했다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현재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슬람 문명이 장악했고, 후에 열리는 대서양을 향한 대항해 시대도 이슬람에게 아시아로 통하는 대륙 진출이 다 막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니까요.


서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건재하던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슬람의 서진西進이 본격화된 11세기부터예요. 이슬람의 확장(셀주크 튀르크의 침공)에 위협을 느낀 동로마가 서유럽의 최고 권력자 교황에게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고요. 앗, 그런데 지원군을 특정 강대국의 왕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교황에게 요청한다는 것이 좀 눈에 띄지 않나요?


셀주크 제국 최대 영역.jpg
오스만 제국의 최대 영역.jpg
셀주크 튀르크(좌)와 오스만 튀르크(우)의 최대 영역_출처 : 중학역사(네이버블로그), 나무위키


사실 서로마의 멸망 후, 아니 정복 전쟁이 멈춘 로마 말기부터 서유럽 지역의 경제는 몰락해가고 있었어요. 그로 인해 정복이 멈춰 노예 충당이 안 되자 농장(라티푼티움Latifundium) 경영을 위해 시민 계급들이 농노로 투입(콜로누스Colonus의 등장)되는 등 중산층도 함께 몰락합니다. 당시 시민들은 도저히 시민의 의무를 감당하기 힘들어 차라리 농노로 귀속되는 게 나았거든요. (이 과정이 참 재밌는데, 우리 역사 속 고려, 조선의 말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중산층의 몰락은 망국의 전조 현상인 것이죠.)


그러한 변화와 함께 군사력 약화로 외적 침입이 빈번해지고 무역로도 다 막히자 화폐를 매개로 한 상업이 쇠퇴하고, 상업으로 교류하던 도시들도 쇠퇴하고, 결국 대농장 중심의 자급자족 지방 경제만 남게 됩니다. 대농장의 소유주는 몰락해가는 혹은 이미 몰락한 나라보다 자기 땅을 지키기에 더 급급했기 때문입니다.(이것 역시 고려, 조선 말기, 혹은 일제강점기에 보이는 현상들입니다. 지금도 좀 보이는 듯요.) 이러한 총체적 몰락이 중세 천 년의 시간이 이전과 이후보다 천천히 흐르게 된 원인이기도 합니다. 절제와 검소함을 강조했던 수도원의 가르침도 이 시대를 헤쳐 나가기에 아주 유용한 지침이었을 거고요.


중세의 봉건제_역사와 함께 하는 세계 여행.jpg 중세의 봉건제도_출처 : 역사와 함께 하는 세계 여행(네이버 블로그)


하여튼 화폐 경제는 물물 교환과 현물 경제로 후퇴하고, 토지를 소유한 지주 밑에서 농노가 생계 유지를 위해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형태의 권력구조가 만들어지는데요, 이는 폐쇄적이었던 중세 신분 제도의 근간이 됩니다. 대농장의 주인과 농노, 그리고 땅주인에게 땅을 분배 받아 다스리고 지키며 충성을 맹세하는 영주(기사). 바로 유럽의 봉건제도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봉건제를 중심으로 이웃나라 공주가 이웃나라 왕자를 만나는, 어디에 무슨 나라가 또 있는지 모를, 몰라서 더 신비한 여러 동화의 배경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분열된 자잘한 나라들의 왕은 초국가적이고 체계적인 네트워크를 지닌 교황보다 권력이 약했어요. ('카노사의 굴욕'같은 사건이 유명합니다.) 말하자면 당시 유럽을 포괄하는 정신적 지주이자 권력의 정점은 교황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마침 권력의 정점을 찍은 이 서유럽의 교황이 동로마의 원병 요청을 교황권 강화와 확장의 기회로 삼으려 합니다. 십자군 전쟁은 서쪽의 가톨릭과 동쪽의 정교회 간의 묵은 갈등도 교묘하게 얽힌, 어찌보면 이웃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려는 가톨릭의 좀 비열한 동기도 있었던 전쟁이었어요.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_위키백과.jpg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_출처 : 위키백과


그렇다 보니 당시 동로마 제국에 위치해 있던 가톨릭의 성지(사실 상 모두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 원정의 1차 목표가 되고, 전쟁의 성격은 점점 교황군(십자군)의 동로마 지원이 아니라 '확장하는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저항'으로 변모해 갑니다. 가톨릭은 얼렁뚱땅 동로마까지 아우르는 유럽 대표 권력으로 올라서려 했던 것이죠. 근데 앞서 짚어 보았듯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이슬람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멋지게 물리치고 유럽 전체를 장악해야 하는데 오히려 버거웠죠.


신의 이름을 건 전쟁으로 밀어붙이는데 적이 워낙 강력하니 그들을 무력으로 종교를 강요하는 세력으로 왜곡하고 싶었을 겁니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쿠란."은 궁지에 몰린 십자군 세력의 이슬람에 대한 일종의 혐오 선전 같은 것이었습니다.



2.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_스콜라 철학

그러나 싸우면서 정든다고, 그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이슬람 학자들과 유럽 세계의 교류가 트입니다.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200여년을 부대낀 셈이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결정적인 교류는 12세기부터 이루어지는데요, 『소피의 세계』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이슬람 학자들을 초청했다는 얘기가 나오죠? 아마 여기서 말하는 이탈리아 북부는 제네바나 베네치아 공국을 말하는 듯 해요. 서로마 멸망 후 한참 동안 침체되어 있던 상업이 9세기 경부터 점차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는데(여기에도 이슬람이 전해 준 상업 계약, 신용 제도, 금융, 시장 운영 기술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 이후 서서히 무역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같은 해양도시였거든요.


경제가 발전할수록 이 도시 국가들은 당연히 더 큰 발전을 위한 선진문명을 원했을 겁니다. 그러니 당시 철학이나 예술은 물론이고 수학, 자연과학 등 실용학문에 있어서 세계 최고였던(그리고 실질적으로 무역로를 지배하고 있기도 했던) 이슬람의 학자들을 초청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유럽에 재발견됩니다. 이슬람이 보존하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작이 이때 다시 유럽에 전달되었거든요.


(물론 5~6세기에도 보에티우스 등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논쟁이 벌어지긴 했지만 주류 철학의 주요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등장하는 건 이때입니다.)


클뤼니 수도원.jpg 중세 유럽 문명의 사회적 기반과 지적 기반을 형성했던 베네딕토 수도회. 사진은 10세기 교회 개혁 운동(교회의 세속화와 타락 반성)을 주도했던 클뤼니 수도원_출처 : 스타투어


마침 카롤링거 르네상스(8세기 말~9세기 초 프랑크 왕국에서 일어난 일종의 문예 부흥 운동입니다. 이때 고대 문헌 연구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공교육의 토대가 마련되었어요.) 이후 꾸준히 쌓아온 역량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유럽에도 대학이 설립되고(아퀴나스도 대학 교수였습니다. 스콜라틱투스, 즉 학자였죠. 당시 학교에 속한 학자들의 철학을 스콜라 철학이라 했어요. 스콜라Scholasticism와 영어 스쿨school은 모두 그리스어 scholē에서 비롯되었죠.)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토대가 마련될 때였어요.


이런 때에 고대 자연 철학의 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귀환은 뜨거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슬람에 의해 전달됐기 때문에 이단처럼 여겨지기도 했고(사실상 이슬람의 언어와 철학으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셈이었으니까요.) 그게 아니더라도 교부철학의 주요 근거인 플라톤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이 있었지만, 수학, 자연철학 등 강력한 설득력을 지닌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망을 막을 수 없었어요.

아라비아 숫자_퍼블릭도메인벡터.jpg 아라비아 숫자, 0의 개념, 십진법 등도 이슬람의 전파를 통해 세계화 되었다._출처 : 퍼블릭도메인벡터


그러니 교회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 안에서 소화해 내야 했습니다. 그 작업을 해낸 것이 바로 소피의 철학선생님과 이름이 비슷한 알베르트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였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 때의 시녀는 노예라기보다 조력자에 가까운 의미로 쓰였어요.)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오히려 철학을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사용할 매우 중요한 도구로서 포용했어요. 요약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성을 통해 자연이라는 신의 창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신은 이성이란 간접적인 계시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진리에 닿고 싶다면 신앙이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신의 직접 계시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과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디테일이 살아있는 진리에 이를 수 있다.


말하자면 이성적 사유(관찰과 논리를 통한 자연과학적 탐구)는 신앙에 배치되지 않지만 성경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는 깊은 진리가 있다는 얘기인데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신학은 여전히 철학보다 한 차원 높은 진리의 창으로서 그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답니다.


사실 마그누스와 아퀴나스의 작업은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으로 포용했다고 요약하기엔 부족한, 매우 큰 업적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라비아-유대, 신플라톤주의, 교부학 저술가들로부터 방대한 사상 자료를 수집하여 당시의 철학 전반, 신학, 성서해석 및 자연과학 등 전 분야를 집대성하는 작업이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들은 가히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였다고 할 만 해요.)


특히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원전의 결함을 보충하며 독창적 태도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종교 철학의 종합적 체계를 구축한 덕에 이때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서양 사상사의 가장 중요한 축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재생산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대단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적 영향력_구글링 캡처.png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현대적 계승_구글링 캡처



3. 신앙에서 독립하는 철학과 과학

마침내 르네상스입니다. 중세가 그렇듯 르네상스도 개념이나 정의가 다양한 용어인데요, 여기서는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어진 유럽의 문화적 대전환기"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자연관, 인간관, 세계관, 종교관 등이 모두 격변을 겪어요. 이슬람이 보존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들이 풍부하게 유입되면서, 유럽인들은 '아, 이게 원래 우리 거였어?'하는 회복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됐거든요.


그래서 이 시기의 대전환은 중세의 종교 중심의 사회문화 혹은 경건한 신앙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여 인간 중심적인 그리스나 로마의 인문주의를 전범으로 삼고자 하는 태도를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르네상스라는 어휘 또한 re-(다시) + naissance(태어나다) 즉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유럽 문화의 본질이 다시 깨어났다는 인식이 반영된 단어인 것이죠.


길드에 속한 장인의 기술 전수_요긴한 정보 나눔 블로그.jpg 길드의 도제 시스템을 묘사한 이미지_출처 : 요긴한 정보 블로그


이슬람에 의해 다시 발견한 고대 세계는 십자군 전쟁 동안의 다양한 부침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점차 경제적으로 나아지고 있던 유럽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어요. 페르시아 전쟁을 치르고 안정기에 접어든 그리스가 도시(polis) 간 경쟁을 통해 점차 성장하고 아고라를 활보하는 시민들을 양성했던 것처럼, 이 시기 유럽에도 상업 경제에 기반한 도시(city)들이 조금씩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 새로운 도시는 생계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고민을 하는 시민 계급을 낳기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예술가들에게 돈을 지불해 역사상 가장 찬란한 미적 유산들을 남기게 하고 철학, 건축, 기술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촉진시켰죠.


polis와 city는 둘 다 '도시'로 번역되지만 둘의 성격은 많이 다릅니다. '폴리스'는 정치적 정체성을 근거로 결집한 고대 도시 국가를 의미합니다. 폴리스의 시민들은 정치적 동질성을 공유하죠. 반면 중세 말기부터 조금씩 형성된 '씨티'의 시민들은 경제적 동질성을 공유하며 형성됩니다. 10세기 경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통제력이 약해진 영주의 성을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요, 이 사람들은 성곽 주변이나 몫 좋은 길목에서 농산물이나 직접 조합(guild라고 하죠)을 만들어 생산한 수공업품을 사고 팔며 경제 공동체를 이룹니다.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로 잉여 생산물이 교역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던 만큼 이들은 점차 성장해요. 그것을 위협으로 느낀 봉건 영주가 이들의 캠프를 자꾸 습격하자 성곽을 쌓아 나름의 방어선을 구축하기까지 하죠. 그러다 나중엔 봉건 영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city도 생겨나는데요, 그 승리로 자치권을 획득한 대표적인 도시들이 앞서 얘기한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같은 도시들입니다.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부유한 자들을 '성곽(burg) 안에 사는 사람들' 즉 브루주아(Bourgeoisie)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이 상인들은 후에 왕정을 무너뜨리는 혁명을 일으키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며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동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러한 흐름이 가능했던 기본적인 토양은 어쩌면 앞서 등장한 마그누스와 아퀴나스가 마련해 주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은 당대의 지식 문화를 집대성한 지적 양분을 신학 안에 포용하면서도 절대적 믿음, 즉 신앙信仰신학神學의 경계를 명백히 했거든요. 즉, 믿음과 지식은 별개라는 것이죠. 이것은 자연과학이나 철학 등이 아무리 발전해도 신앙의 권위를 위협할 수 없게 하는 장치로 작용하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신앙에 얽매이지 않고 나머지 학문이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도 같아요. 실제로 아퀴나스 이후 철학과 과학은 신학과 독립해 발전해 나갑니다.


고해성사_신앙신보.jpg '네 죄는 네 책임이다?' 고해성사의 한 장면_출처 : 신앙신보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인간중심주의와 인문주의가 이때 다시 유행하는데요, 여기에서도 중세의 유산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해성사처럼 신을 일대일로 접하여 믿음을 고백하고 자신을 성찰하게 했던 중세의 종교 문화가 사람들에게 개인을 인식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던 것이죠. 그 잠재의식 위에 받아들여진 인간중심주의는 신의 피조물인 자연의 일부로서가 아닌, 개별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을 낳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간을 다시 보게 됩니다. '어, 너 그냥 죄의 파편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대단한 존재였어?'


인간의 능력은 끝없이 발굴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더 많은 능력을 발굴하기 위한 체계적인 시도로서 교육에 대한 관심도 커집니다. (중세에 자리 잡은 학교의 체계가 이 시기에 더 정밀해지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겠죠.) 이에 더해 실제적 효용을 중시하는 인식이 퍼져 기술 발달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 결과물들(책에 나오는 여러 발명품들)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더 북돋아 주었고, 급기야 이렇게 특별한 인간이 점점 발전하는 것은 '신의 의지'라고 믿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선적인 역사관과 연결되면서 끊임없는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수렴되고, 이 믿음은 모든 분야에서 제한 없이 추구됩니다. 안타깝게도 이 믿음은 대항해시대와 맞물려 제국주의와 잔인한 식민 정책의 밑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하는 태도는 이 시기에 실험적 태도로 발전되어 자연과학을 발전시켜 수 천 년 간 내려오던 인류의 세계관을 뒤흔드는 의미 있는 전환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말에 등장한 천문학 3대장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는 수학과 관찰을 통해 우주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고(지동설) 근대 물리학의 토대(인력과 관성)를 마련했죠. 이 혁명은 기독교적 경건함에 숨은 인간으로서의 안일한 특권 의식을 돌아보게 했으며, 그 도전적인 면 때문에 당대엔 엄청나게 탄압 받았으나 인간의 이성과 진리를 탐구하는 태도에 더 엄격히 접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후대에 아이작 뉴튼 등을 통해 이뤄지는 과학 혁명의 단초가 된 것은 덤이고요. 덤도 정말 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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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_출처 : 위키백과



4. 민족 의식의 형성과 개신교의 출범

그리고 앞 세대의 부패한 유산에 대한 저항도 시작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중세를 대표하는 권력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에 있었죠. 말하자면, 교회가 중세를 대표하는 권력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수도회의 검소하고 경건한 문화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부패하고 있었죠. 부패는 권력의 속성인가 봐요.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15세기, 면죄부로 대표되는 교회의 부패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는데요, 『우신예찬』으로 유명한, 세르반테스나 셰익스피어같은 대문호에게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가 그중 가장 앞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는 것조차 크나큰 영광으로 생각할 만큼 에라스무스는 당대 인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지식인이었죠. 그런 그가 아끼고 옹호하는 문제적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종교개혁과 개신교 출범의 주인공 루터Martin Luther입니다.


딱 봐도 온건한 느낌의 에라스무스.jpg 딱 봐도 온건하면서 단호한 느낌의 에라스무스_출처 : 위키백과


에라스무스는 당시 유럽 전역을 흔들고 있던 루터의 "95개조 반박문"(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한 문서. 왜곡된 기독교 가치관을 바로 잡고 신학적 토론을 촉진하고자 루터가 퍼뜨려요.)을 긍정적으로 평하고 있던 중 루터의 편지를 받고 그와 교류하기 시작합니다. 루터 또한 에라스무스를 존경하고 있었고 (루터가 신약성서의 독일판 번역을 할 때 참고한 그리스어 원전도 에라스무스 판이었다고 하네요.) 그런 만큼 그의 인정을 받아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개혁에 힘을 실어주길 원했죠.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선을 긋습니다. 급진적인 루터와 달리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에 있어서는 다소 중도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거든요. 루터의 개혁이 오히려 수구 세력에게 득으로 작용할 위험과, 급진적인 개혁이 부르게 될 교회의 분열을 경계한 거죠. (결국 그 유명한 "자유의지 논쟁"을 끝으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 서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는 멈추지 않았고 결국 그가 보여준 의지와 엄청난 추진력은 부패한 교회 비판에 대한 공감대, 서서히 형성되던 민족의식, 그리고 인쇄술의 발명과 더불어 종교개혁이라는 폭발을 만들어냅니다.


종교개혁이 부른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서의 번역이었어요. 종교개혁 이전엔 성서가 모조리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었어서 그때 이미 고대어가 되어버린 라틴어를 공부한 성직자가 아니면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성서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교회와 성직자의 특권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종교 개혁을 통해 성경은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 말하자면 자국의 언어(루터의 경우 독일어로 번역을 하죠.)로 번역되고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을 통해 대량으로 복제되어 널리 퍼집니다.


루터 성경.jpg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신약성경_출처 : 주간 기독교


이는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촉진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통해 같은 언어를 공유한 사람들이 동질감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근간인 민족주의의 뿌리가 됩니다. 또 하나는 더 이상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만 신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성서가 주어진 이상 모두 개인으로서 치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추구해야 했으니까요. 이는 성직자를 통한 고해성사가 암시해 주었던 '개인'에 대한 인식을 증폭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어요. (전에 추천해 드렸던 『개인의 발견』이라는 책에 이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스스로가 한 명의 개인이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개인...? 내가 개인이라고? 난 아빠의 딸이고 신의 자식일 뿐인데?'하던 시절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바뀌게 되죠. 이러한 개인으로서의 자각은 후에 인권 의식 발달의 매우 중요한 전제로 작용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인식한 경험은 개인으로서의 타인에게 공감할 수도 있게 해주었거든요.


종교개혁이 성공하고 개신교가 형성되면서 에라스무스는 비판하던 가톨릭의 옹호도 받지 못하고, 개신교의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채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루터에게 비판 받았던 그의 자유의지론은 다음 주부터 얘기할 근대 철학의 기초가 되어줍니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합리주의자들이 중시한 자율적 인간 이성도, 칸트 윤리학의 도덕적 자율성도 모두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철학들입니다.


화형 당하는 잔다르크.jpg 마녀사냥으로 화형 당하는 잔다르크_출처 : CEONEWS


물론 이런 첨예하고 이성적인 종교 개혁에도 불구하고 마녀사냥으로 대표되는 중세적 어리석음은 17세기까지도 계속 되었대요. 비단 여자만이 그런 폭력의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니었을 텐데, 굳이 '마녀'를 사냥한다는 걸 보면 확실히 여성 피해자가 두드러졌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는 당시 개인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인식이 지니고 있는 '평등'에 대한 욕망이 여성을 통해 표출되었을 때 더 두드러졌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여성은 가장 오래된 '약자'이자 '다수의 소수자'였고, 남성을 앞서는 성장을 들킬 때마다 가장 강력한 탄압을 받는 존재이기도 했으니까요.



5. 다음 주 진도 및 subtext 소개

힐데의 아버지가 보여주는 초월적 능력과 그것에 저항하듯 힐데의 실체에 다가서려는 소피의 노력은 인류의 가능성을 무한히 긍정하는 르네상스인 같으면서도 열렬한 신앙인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문득문득 부딪히는 삶의 문제들 앞에서 가장 합리적인 고민 끝에 우리가 맞닥뜨리곤 했던 것은 결국 무엇이었나요? 끝나지 않는 우리의 질문처럼 소피의 여정은 계속 됩니다.


사실 이번 주에는 성찰적 글쓰기의 진수를 보여주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추천하려 했어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동하면서 어떻게 개인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는지 문학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해서요. (나중에 평을 보니 그렇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어요.) 하지만 『개인의 발견』부터 그 얘기를 너무 한 것 같아서, 오늘은 유럽의 중세를 요동치게 했던 유럽 밖의 힘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이슬람 문명』입니다. 정수일님이 집필하셨고, 창비에서 출판했어요. 좀 두껍긴 하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슬람의 역사적 위상은 물론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도움을 받은 책이에요. 살금살금 부담없이 읽으면 꽤 재밌습니다.


이슬람 문명.jpg 출처 : yes24


왠지 너무 힘들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단락은 여기서 마무리 합니다.

다음 주까지는 '바로크', '데카르트', '스피노자' 이렇게 세 단락을 함께 읽기로 해요.


꾸준히 제 숙제 검사 해주시는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가볍게 시작한 독후감에 거의 목숨 걸고 있어요. 다음 주에도 꼭 검사하러 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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